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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Nov 01. 2021

안녕히 잘 있으세요

언어가 느린 아이가 하는 색다른 인사법


딸아이가 조금 다르다고(당시의 이상함을 지금은 다름으로 적어본다) 느낀 건 돌 무렵부터였고, 확신했던 것은 만 세돌이 지나서였다. 

통상적이고 일반적이라고 불려지는 발달의 수순을 밟고 딸아이는 자라지 않았다. 

아이는 책에 적힌 이론과 보통과 상식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게 자랄 수 있는 것이었다. 




딸아이는 유아교육 책에 기록된 여러 아이들 중 '우는 아이'에 속했다. 

딸아이는 기존에 알고 있던 발달 범주(0세 기준)에서 벗어난 채 자랐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  기기, 잡고 서기, 걷기가 순차적으로 증가하지 않았고, '엄마, 맘마, 아빠' 기본적인 언어의 발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좋고' '싫음'의 단순한 감정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배밀이를 할 때는 오로지 오른쪽 발의 도움을 받아했고, 엎드려 팔과 다리로 기는 대신 앉은 채로 발과 손을 이용해 엉덩이로 기었다.  엉덩이로 기어 다니다가 잡고 서지도 않고, 16개월이 지나서야 걷는 딸아이를 보며 당시엔 '울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뒤집기를 했는지 조차 기억에 없는 것은 매일 같이 우는 통에 안고 있었던 적이 많아서였다.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고 잘 나오지 않은 젖을 물리고 나중에는 쪽쪽이도 물렸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한 듯 빨지 않았다. 5분~10분도 채 안돼 입을 떼고는 그것이 아니라는 냥 세상 무너질 듯 온몸으로 울었다.  


백일이 되면 울지 않으리라- 기적을 바랐지만, 백일이 지나고도 우는 딸아이를 매일 붙잡고 나는 어느 날은 함께 서럽게 울었고, 어느 날은 침대에 던지고, 어느 날엔 무엇도 하지 않고 내내 울도록 놔두었다. 밤 낮 할 거 없이 우는 딸아이가 점점 '근심'이 되어갔다. 3Kg도 되지 않는 몸이 새 빨게 지도록-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우는 딸을 어떻게 사랑해 주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괴로움과 화에 복받쳐 우울에 잠기며 점점 지쳐갔다. 돌이 지나서도 그칠 줄 모르는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밤 새 듣다 그날 아침엔 돌연 한의원을 찾았다. 그 작은 몸에 침을 꽂고 온 날은 기저귀에 황금변을 가득 누고 잘 자는 가 싶더니 새벽에 어김없이 깨서는 한바탕 울고는 모빌을 만지작 거리며 노는 저 아기가 왜 저렇게 우는지... 그토록 원했던 내 아기가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지... 나는 왜 이런 거 하나 넉넉하게 감당하지 못하는지... 내가 모자란 탓인가. 딸아이의 울음이 나의 결핍과 상처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기도 해 자꾸 마음을 긁어놓고는 끝없이 밀려가다 결국엔 바닥을 보이게 했다. 그 시커먼 속. 보여주고 싶지 않고 들키고 싶지 않았던 시커먼 속내를. 


시커먼 속내가 드러나자 나는 더 형편없는 '엄마'가 되어갔다. '돌'지경에 이르게 되자,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울지 말라고 무섭게 혼을 내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목소리가 커져갔다. 울지 말라고 왜 우냐고, 소변과 대변은 화장실에서 보는 거라고, 잠에서 깨 우는 아이에게 밤에는 자는 거라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아이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담지 못했다. 이유 없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고, 팬티에 대변을 묻히고, 밤마다 깨서는 울었다. 꼬박 6년을 그리 하고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7살이 되고서야 그 모든 것을 멈추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땐 두 돌이 지나 막 어린이집에 보낼 때였다. "말을 안 해서 걱정이에요"라는 말에 어린이집 선생님과 사람들은 생일이 늦잖아요- 기다려 주세요- 했고 정말 내가 예민한 가 싶어 기다렸다. 두 돌이 지나고 5살이 되자, 불안이 점점 확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두 개 이상의 단어의 결합(엄마 물 줘, 오이 싫어, 사탕 주세요 와 같은)은 말은 고사하고 할 수 있는 단어들 조차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네"라고 대답해야지 하면 같은 입모양을 하고는 "따"라는 소리를 냈다. "따" 아니고 "네"라고 다시 힘주어 말하면 더 세게 "따"라고 이야기했다. 조음이 부정확하고, 부모와 또래와의 간단한 소통에도 어려움을 보였다. 대화에서 오고 가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어와 사물을 매칭 하지 못했다. '언어'가 안되니 '울음'이 나온 건 일종의 소통의 창구였을지도 몰랐다. 7세가 되니 할 수 있는 말의 조합은 늘었으나 '조음' 문제가 더 부각되어 자연스러운 대화가 더 어려워졌다.  


시에서 지원한 언어 발달 검사를 무료로 받았고, 12개월 이상이 늦다는 결과지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고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렇게 5살 때 시작한 언어치료를 현재(8살)까지 받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대학병원에서 언어 인지를 비롯한 전반적인 검사를 받았고, 언어는 여전히 또래보다 16개월이 느리며 학습에 필요한 문제를 처리하는 '속도'가 또래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결과지를 받았다. 한글을 모른 채 초등학교에 입학해 이제야 단모음과 자음을 떼고 한 자릿수 덧셈을 겨우 하고 큰 수와 작은 수의 차이점을 이해하기를 어려워하며 100까지의 수를 세지 못한 채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한글도 모르는데 아이를 어떻게 학교를 보낼까,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너무도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 모습이 신기할 지경이다) 집에 와서는 매일 학교 놀이를 하고, 선생님 이야기를 하고 친구들 이야기를 한다. '장애'와 '정상'의 어느 경계쯤에서 딸은 자신의 속도대로 커가고 있었다. 


7살 때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림을 붙여 놓고 어느 계절인지를 물었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딸아이를 붙잡고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면 '봄'이라고 자정을 넘기며 설명했던 이유는 남들이 아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였다. 이것도 모르는 내 아이를 남들이 어떻게 볼까, 싶어 걱정을 잔뜩 집어 먹었다. 나비 그림을 보고 나비 그림 밑에 글자는 '나비'라고 읽는 거야-라고 백번을 설명해도 아이는 끝내 '나비'라고 읽지 못했다. 나는 내가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틈만 나면 손가락질을 하는 세상에서 내 아이를 지키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이는 세상보다는 엄마인 나에게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다. 그럼에도 엄마가 외로워 보이면 "엄마 짜랑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반성하고, 미안했다. 


나의 우려와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밝고 건강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받아쓰기를 하고 와서도 "엄마 나 백점 맞았어"라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며 학교를 다녔다. 꾸중을 더 많이 붙들고 산 나와는 달리 아이는 '칭찬'을 더 많이 붙들었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나와는 많이 달랐다.


어느 날, 치료실에서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선생님께 인사해야지"라는 내 말에 "안녕히 잘 있으세요"라는 말을 아이의 입에서 처음 들었다. "엥, 그게 뭐야 '안녕히 계세요'라고 해야지" 선생님도 나도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이따금씩 깔깔거리며 "안녕히 잘 있으세요"라고 인사하는 딸아이의 인사법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오늘도 인형 놀이를 하며 '안녕히 잘 있으세요'라고 인사한다)


그냥 두기로 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내 아이를 일반적이고,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의 익숙한 시선에서부터 지키고 싶어서였다. 나조차 그랬으니까. 조금만 이상하게 굴어도 정색하며 아이를 나무랐으니까. 그런 시선들이 숨이 막히면서도 나도 그렇게 볼 때가 많았으니까. 


말하지 않는 눈에서도 들리지 않는 눈에서도 소리가 들리고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마음에 새기고 스쳐갈 때가 많았다. 마음을 가장 많이 담는 것은 다름 아닌 눈이었으니까. 


나는 내 아이가 부디 그런 시선에서 보호받기를 원하고, 모든 아이들이 보편을 담은 시선에서 보호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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