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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Jan 11. 2022

봉숭아 물

다홍색도 아닌 빨간색도 아닌 붉은 물이 열개의 손가락에 칠해진 날들이 있었다. 


얼굴로 비 오듯 떨어진 땀방울을 옷소매로 닦던 한여름의 시간을 지나 맑고 고운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가을 하늘 아래로 낙엽이 수북했다. 나는 어린 발로도 낙엽 밟는 걸 좋아했다. 발 끝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면 달달한 사탕 맛이 돌연 입안에서 도는 거 같았던 느낌이 좋아 연신 낙엽을 밟던 어린 발.


메마른 낙엽의 소리가 착착착 발에 감기던 때, 선선한 바람이 창문 틈을 간질이던 가을밤이었다. 

 

엄마의 손에 들려 있었던 까만 봉지 안엔 초록색의 긴 잎과 분홍색 빨간색 여린 꽃잎들이 뒤엉켜 있었다. 엄마는 달 뜬 밤을 뒤로하고 낡은 문을 닫고 검은 봉지를 든 채 집으로 들어왔다. 하루치의 피로가 쌓인 얼굴이지만 그날은 개의치 않은 듯 긴긴밤이 이어졌다. 검은색 봉지를 네모지게 잘라 실을 준비한 엄마는 초록잎과 꽃잎과 백반을 한 데 섞어 짓이겼다.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린 채 집중하는 서른 즈음의 엄마를 유심히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가을밤이었다. 어린 나를 앉혀 놓고 거뭇해진 봉숭아 꽃잎을 동글동글 굴려 작은 내 손톱 위에 조심히 올려 주던 젊은 엄마. 잘라 놓은 검은 봉지를 얇은 손가락에 감싼 후 하얀 실을 질끈 묶던 엄마의 고단한 손. 가지런 한 손가락 위로 쏟아진 엄마와 내가 평화롭게 반짝이던 시간. 연신 귀뚜라미가 내내 울어대던 가을밤이었다. 


동이 트자마자 간밤에 무사한 열개의 손가락을 살핀 후 검은 봉지를 다다닥 풀고 나면 어김없이 작은 손톱에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나는 곱게 물이 든 손톱을 한참 바라보곤 했었다. 어느 해엔 단단히 싸 놓은 검은 봉지가 간밤의 뒤척임에 자리를 이탈하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때의 그 기쁨과 희열이란. 마치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풀기만 했던 어린 슬픔이 봉숭아 물 하나에 펑-하고 터지던 순간, 나는 비로소 제 나이답게 웃어 보였다. 종일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생글생글거렸을 어린 나. 


마주 앉아 젊은 엄마의 얼굴을 오래오래 볼 수 있었던 시간.

해치우듯 저녁을 먹고, 긴긴밤을 함께 보냈던 순간.

봉숭아 꽃잎을 꺾어다가 내 손톱을 물들이던 가을밤이 고요하게 물들던 밤. 


어느 가을은 발개진 손톱 위에 투명 매니큐어를 바르고

어느 가을은 첫눈이 오고도 남아 있던 끄트머리의 봉숭아 물을 보고 

어느 가을은 엄마도 나도 이십 개의 손가락에 봉숭아 물이 들었던 


가을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던 날들이 있었다. 

물든 손톱이 내내 떠나지 않고 머물러 주기를 바라고 바랐던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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