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J에게
사랑하는 J에게.
우리가 함께 나눈 숱한 봄이 생각난다. 계절에 끼인 나를 찍어 주던 네 모습. 카메라 앞에 서 있던 너의 서툰 모습. 화사한 봄 햇살 속에서 까만 사연들은 잠깐 내려놓고 곳곳에 스며든 봄 햇살에 마냥 다사로웠잖아 우리. 나는 네게 나를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지. 생생하지만 곧 바스러질 거 같은 여린 꽃잎(약하다는 표현임을 알아줘) 같아서 나는 자신에게조차 '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거든. 그래서 나는 내가 애틋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진심'이 중요한 사람이잖아.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15살 때부터 우리가 나눈 우정이 조금도 퇴색해지지 않았다고 믿어. 이미 가진 우정에 무엇을 더 얹는다고 그 크기가 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아. 애초에 완성된 우정이지. 그저 우리는 완성형 친구라는 믿음.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남들보다 더 자주 보는 관계라는 것은 역으로 일상 곳곳에 놓인 사소한 갈등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이기도 하잖아. 나는 나의 단점들이 너에게 많이 노출되었다고 해서 전혀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어. 그 또한 내 모습이니까. 감출 필요가 없으니까. 부러 보여주는 게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니까.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은 늘 행복했고, 너와 함께 있으면 두 개의 창을 확 열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 어떤 제한도 없이 마음껏 보게 되었어. 너는 내게 그랬어. 나는 네게 어땠니?
내가 가는 어떤 곳이든 따라온다고, 지난봄에 너는 그렇게 말했지. 그 해 6월 제주도에 함께 있었고. 서핑을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털며 오는 내게 너는 이렇게 말했어. "네가 정말 재미있게 놀아서 다행이다. 네가 좋았으면 나는 괜찮아" J야! 나는 그때 갑자기 숨 막히게 외로워졌어. 내 둥이들을 봐주고 있었던 너를 잊고 나만 즐거운 거 같아서 네게 미안하던 참이었거든. 동시에 가감 없이 주는 다른 사람의 애정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 거야.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것은 결국 받으면 무조건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나는 그렇게 살아왔던 거야. 얼마나 각박한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부모님 사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내가 어떤 사랑을 그저 받을 수 있었을까.
나 또한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함께' 즐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나도 네게 그런 무한 애정을 주고 싶은 친구라는 거 알고 있지?(고개를 끄덕이는 네 모습을 상상한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좋았던 우리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로 네가 가진 수많은 생각과 마음들에 생각해 봤어. 하루에 충실한 나는 내일의 걱정이 없었어. 네가 무엇이 어렵고 힘들었을지를. 생각해 보다가 우린 처음부터 많이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야. 네가 얼마나 나를 '배려'하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느꼈던 거야. 너는 미안해하는 내게 늘 이렇게 말했어. "너라서 괜찮아" 나라서 괜찮은 일이 아니라... 나는 네가 정말 그것이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싶었던 거야. 그것은 곧 네겐 괜찮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더라고. 우습지? 우린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고 했지만... 서로의 다름에 딴지를 걸고 말뿐인 머리로만 인정하고, 마음으로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던 모습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지도 몰라. 서로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착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정 말이야.
사람 마음을 어떻게 돈으로 사고, 진심을 어떻게 돈으로 팔 수 있을까. 손아귀에 꽉 쥐고 싶다고 쥐어 쥘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자랐어. 아무리 잘해 줘도 뒤통수를 치고, 마음을 이용하고는 등을 보인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으니까. 타인의 감정을 통제하고 자신의 마음에 탁 맞도록 맞출 수 없는 것 또한 사람 마음임을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몸에 베였었던 거 같아. 1등은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님을 알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익숙하면서도 밀려드는 외로움에 치를 떨며 자라 왔어. 그래서 나는 꼴등에 더 마음을 주고 외롭게 놓여 있는 것들에 더 마음을 쏟는 것일 수도 있어. 들러리라는 자리에 자주 놓이고 관심 밖의 존재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자리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매일 같이 발로 꾹꾹 밟고 걸어왔던 생들이 있을 거야. 그저 우리는 제 자신이 될 뿐. 다른 사람이 될 순 없어. 우리 자리에서 '우리'가 되자. 기운 내자. 잘하고 있다고 믿자.
J야... 중고지만 외제차를 들이고 대학원 서류를 넣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네가 보인 눈물을 아주 아주 오래오래 생각했어. 새 차도 아니고, 대학원 합격 소식을 받지 못한 일에 왜 너는 눈물을 보인 것일까를.(부족한 나를 용서해)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친군지 밤잠을 설쳐가며 생각했어. 네게 슬픈 일이 닥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함께 아파해 줄 수 있을 거 같은 마음엔 한치의 오차도 없지만 기쁘고 행복한 일에 나도 정말 마음껏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 친구인지 나를 점검했어. 내 심령이 얼마나 애통하고 가난한 지 몰라. 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것보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추악한 죄인인지를...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매일 느껴. 슬픔과 기쁨을 매일같이 오가는 거 같아.
내 앞에 닥친 지난한 문제를 한 줄로 요약해서 너를 이해시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문장을 찾다가 적절한 단어를 고르지 못하고 이내 포기했어. 설명할 수 없는 삶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삶도 있고, 침묵해야 하는 삶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나로 인해 네 일상이 흐트러진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었어. 일주일 가까이 연락 없는 우리가 어색할 정도로 그만큼 가까웠던 거야. 너무 안심이 된다. 변하고 달라지는 거 없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우리 우정이 그런 거야. 수와 만남에 비례하지 않고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우리 우정이 그런 거야. 사소한 것에 더 많이 툴툴거리고 숨기기를 거부하고 여과하지 않는 감정을 내보이는 것에 더 많이 익숙해지자. 서로가 그런 존재라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싣자.
곧 봄이 오겠지. 여하튼 우리는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긴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위로로 가 돼. 마음관 다르게 고요한 일상이 얼마나 평범하게 흐르는지 모르겠어. 나는 잘 지내. 여전히 녹록지 않은 삶의 문제들 틈에서 감사한 것들을 찾아보려고 애쓰며 중간중간 찬양도 듣고, 별안간 우울했다가 내일 만나게 될 가족들 생각을 하느라 사실 마음이 많이 바빠. 너도 여전히 일이 힘든지 궁금해. 호방한 기세로 잘 헤쳐나가고 있으리라 믿어. 곧 커피 한잔 하며 수다 떨 날을 기다리며. 봄을 기다리며 내 친구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철없는 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