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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Feb 22. 2022

천국으로 부치는 감사

목사님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만 난 목사님의 부고 소식을 모든 장례절차가 끝난 뒤에야 알았다. 시아버님의 생신이라 오랜만에 밖에서 점심을 먹고 용돈을 쥐어 드리고 오는 길이었다. 숙제하듯 해야 할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왜 이렇게 찬 기가 가시지 않는지, 몸을 떨며 잿 빛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 달 전, 담도암 말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디에 계시는지, 알게 되면 꼭 연락 달라 부탁해 놓은 상태였는데... 결국엔 뵙지 못한 채 핸드폰에 뜬 알림을 읽었다. 


저녁이 물러갔을 때, 나로부터 소식을 들은 친구가 한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목사님 사진은 이 사진이 전부라며. 잊고 있었던 눈물이 그제야 올라왔다. 산다는 건, 사소하게 올라오는 감정들도 마음의 한 구석에 놓인 서랍에 넣어 두고 잊어버릴 때가 많은 것과 같았다. 일부러 꺼내 봐야 하는 것들이 있었고, 시간의 흐름과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미루게만 되는 하루가 쌓이는 게 삶이기도 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 허공을 맴돌던 눈이 유일하게 교회에서 반짝였던 때들이 말풍선처럼 떠올랐다. 믿을 수 없는 촌스러운 모습의 중 1 때였다. 몇 번 말도 주고받지 않았던 친구가 대뜸 물어 왔다. 

  "나랑 같이 우리 교회 갈래?" 

서먹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간 뒤로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간 교회였다. 나는 그곳에서 지금의 절친들을 만났고, 여전히 생을 나누고 있음에 감사했다. 잘하지도 않는 노래 실력으로 찬양이 좋아 찬양팀에 들어갔었고, 마음씨 고운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는 것이 더없는 기쁨이라 매일도 갈 수 있을 거 같은 교회였다. 그 무렵 찬양팀을 맡아 줄 간사님으로 오신 목사님을 그때 처음 뵀었다. 각진 턱에 안경을 쓰고, 예의 있게 웃던 목사님은 늘 깔끔한 표정과 단정한 모습으로 한결같았다. 통기타를 둘러메고 'God Will Make A Way'를 정직하게 부르시던 모습은 당시에 모두가 기억했던 목사님의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긴 터널에서 나온 거 같은 기분으로 나는 친구와 목사님과의 만남을 내 인생 최고의 만남이라 여겼고,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라고 기회가 오면 늘 적고 말했다. 


상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상처에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보기 어려웠다. 모두가 친절했지만, 다 같은 친절이 아니었고 보이지 않는 진심은 오로지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 베푼 친절들에 감사했지만 결정적일 때 닿지 않았던 손들을 보며 울먹인 채 마음을 닫아 버리곤 했었다. 발에 밟히는 잡초도 소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처럼 목사님의 미소와 마음엔 거짓이 없었다. 


끔찍한 소란이 가득했던 현관문을 닫고 교회에 오면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집에서의 일은 잊은 채 친구들과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부모님 생각이 들면 두 손을 모으고 엉엉 울었다. 제발 이 끔찍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조르듯 기도하다가도 친구들을 보며 말갛게 웃고는 했다.  

전 날, 아빠의 폭력에 꼼짝없이 당한 엄마를 본 날도 교회에 갔었다. 

지긋한 미소로 다가 온 목사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부모님이 이혼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뱉어 버렸다. 찬양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같은 톤과 같은 높낮이를 가지고 계션던 목소리엔 어떤 동요도 없이 부모님은 '함께' 살아야 좋은 거라며 교과서에 실릴 만한 정답을 내놓으셨지만 싫지 않았었다. 성경을 펼치고, 부모님이 왜 이혼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고 나긋하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이 눈앞에 선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느껴 본 다정함이었다. 알게 모르게 차별이 뒤섞인 삶에서 일관된 따뜻함을 우직하게 내 보이셨던 목사님을 나는 마음속으로 많이 존경하고 따랐다. 믿지 않은 부모님을 대신해 주신 수련회비를 감사히 받으며 이 은혜를 꼭 갚아야지 마음먹었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학창 시절에 탄탄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감사한 분이셨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하며 꿈을 종이에 그려 보라고 한 날, 처음으로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건축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꿈'은 구체적으로 그리고 매일매일 꾸라고 하셨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미대에 떨어져 말 못 할 패배감을 맛보고 새로운 길목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목사님 앞에 섰다.  

   "결국 10년 뒤에는 모두 똑같이 살고 있을 거야. 그러니 무엇이든 해봐" 

늦음이란 없다고 했던 그 변함없고 단단한 목소리. 나는 그 말을 붙들고 또 살았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고서는 자주 뵙지 못했고 부러 연락을 취해야만 뵐 수 있을 정도로 여념 없이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불안하지만 꿋꿋한 발걸음으로 선교 길에 올랐을 때 큰 마음을 보태시고, 결혼 예배 땐 기도로 축하해주셨던 인생의 스승 같은 분. 담담한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완 다르게 기도를 해주실 땐 포효하는 사자처럼 간절히 부르짖던 목사님을 보며 신앙의 첫 단추를 바르게 끼울 수 있었다.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라지 못했을 믿음을 안고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때였는데. 


미루기만 했던 마음이 때 늦은 채 밀물처럼 밀려왔다. 거르지 말고 인사하고 잊지 않고 감사를 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후회가 들었고,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죄송했다. 

또박또박 전했어야 할 마음이었다.  



천국에 계신 목사님께 뒤늦은 마음을 이제야 전한다. 



목사님,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정한 마음을 한결같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존경해요. 목사님.  

목사님과 함께 했던 믿음 생활이 여전히 나를 지탱하고, 나태하고 머물고 있는 신앙이라 면목이 없어요. 

한 발 한 발 더딜지라도 나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좁고 가느다란 길을 늘 말씀하셨듯이 겸손한 모습으로 감사함으로 건너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어요. 

지*랑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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