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울었어야 했다. 제대로 슬퍼했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 상담 선생님을 만나
두세 시간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그렇다.
나는 마음에 난 오래된 상처를
아무렇지 않은 척 잘도 덮어두었고
그 덕에 상처에서 고름과 진물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다.
마흔이 되며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상처들이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을 질렀던 것일까?
젊을 땐 듣지 못한 소리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통스럽지만 고맙다.
그동안 그렇게 내 안에서
많은 신호음을 보냈었을 텐데...
왜 그리도 무시한 채 살아온 걸까?
이제라도 반응해 준 내가
참 기특하다.
잘 울었어야 했다.
제대로 슬퍼했어야 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입 밖으로 내뱉었어야 했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입을 꾹 닫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누른 채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억지 미소가 어느 순간 진짜 미소로
둔갑을 하고 나의 오감을 마비시켰다.
그러다 보니
내 장점이 잘 웃는 것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상이 참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덮어두었던 나의 상처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더 두었다가는 잘라내던가
죽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위기가 코앞에 다가왔던 걸까?
이런 내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를 창조한 분께서
돕는 사람을 보내셨나 보다.
참 우연히 만난 상담 선생님.
나는 사회복지사이자 상담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위치였지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올 거라는 생각도
1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상담 선생님은 나의 깊은 내면을 보셨고
안타까우셨던지 무료로 상담을 해주고 계시다.
평생 살아오면서 이러한 은인이자
인생의 멘토를 한 명이라도 만난다는 것은
참 축복된 일이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딱 한 가지 감사하는 것은
만남의 축복을 위한 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해주셨다는 사실.
그 덕분에
오늘도 나는 엄마로 인해 울고
또 엄마 때문에 웃어본다.
내가 내 딸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를
그토록 원하듯이
나의 엄마도 나에게 좋은 엄마가 되려고
고군분투하셨겠지.
엄마의 상처는 나의 상처보다
더 깊고 오래되어
대를 거듭하여 상처가 대물림되어
더 심각한 증상을 낳은 것일까?
그래서 엄마의 성격마저
차갑고 싸늘하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이제는 엄마를 이해해 보려 한다.
처음에는 미워하는 것조차
딸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 여겼기에
속에서 올라오는 미움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우울증만 심해져 갔는데...
이제 부모를 미워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미우면 밉다.
싫으면 싫다.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 토해 내보다 보니
아주 조금씩 연민의 감정도
고개를 든다. 아직 어색하지만 말이다.
억지 텐션,
억지 미소,
이제 그런 거 말고
가장 나다운 표정,
가장 기본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