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부모와 코디펜던트 딸
사춘기는 나쁜 건 줄 알았어요.
사춘기는 나에게 사치였죠.
공부에 목이 메어 바빴고
성공을 위해 달리느라 정신없었어요.
나에게 사춘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세탁소집 외동딸인 나는
늘 돈 버느라 바쁜 부모님에게
짐처럼 느껴졌고
잠짝이 되어 버려지기 싫었던 나머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할머니를 돌보며
가정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미치도록 반항기를 거부했어요.
순종적인 딸.
아직도 부모님은 나를
착하디착한 딸로 기억하시죠.
"어릴 적 네가 엄마의 탄식을 들어주었기에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엄마가 정신이 온전할 수 있었단다."
나르시시스트 아빠가
코디펜던트인 나에게 하는 말이에요.
그래요.
적어도 부모님의 기억 속에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딸로 남아있어요.
나는 속으로 말하죠.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 말...
"그래서. 엄마는 정신이 온전했을지 모르겠는데요.
그런데요...
난 온전치 않았어요.
난 너무 어렸거든요.
엄마의 한탄과 탄식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모든 것이 내가 존재하는 탓인 줄만 알았거든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했지만
공감하는 척했지만...
아뇨.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알겠어요.
늘 가면을 써야만 했어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어른보다 성숙한 척."
그토록 척을 잘하던 나는
사춘기를 부정했고
그렇게 사춘기를 모른 채 지나왔죠.
잘 사는 줄 알았어요.
남들 다 하는 사춘기가 없었으니
나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상한 자부심까지 느껴졌죠.
그런데 말이죠.
사춘기를 그냥 지나쳤더니
마흔이 되어서야
마음 깊은 곳에 나도 모르는
싱크홀을 보게 되었어요.
그 구멍은 나를 괴롭혔고
자아를 망가뜨리기 시작했어요.
빌어먹을 자존감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건지
밑바닥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건지...
공허함은 자주 멍한 상태로 있게 했죠.
'공황'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아요.
어리고 여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감각을 마비시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요.
'엄마'의 따뜻함과 돌봄의 결핍은
내가 엄마의 자리에 있을 때
엄마와 내가 그랬듯
어색함만 자리 잡았죠.
어떻게 딸의 기분을 맞춰주어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딸과 놀아주어야 할지도 모르고
딸이 사랑받고 싶어서 하는 말들인데도
사랑이 아닌 상처로 해석해버리곤 했죠.
딸에게 사랑받고 싶은데
딸에게 이해받고 싶은데
그러기엔 아직 너무 어린 딸인데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나와 같은 딸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 공허함을 물려주고 싶지가 않아서
요즘 '연기'를 연습하고 있어요.
아직 초보 연기자라 많이 어색하지만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보려 해요.
아이도 느끼겠죠.
엄마라는 사람이 참으로 어색하게
왜 저러나 싶겠죠.
그래도...
언젠가는 엄마의 눈물 어린 노력을
알아주는 날이 오겠죠.
'우리 엄마, 참 애쓴다.'라며
이해해 줄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