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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이니 Feb 11. 2023

[사랑에 살다, 장옥정]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후궁 장옥정 그리고 인현왕후와의 갈등 이야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책, 드라마, 연극으로 많이 접하기도 했을테고 인터넷에는 '역대 장희빈 계보'까지 있을 정도로 드라마에서 꽤 많이 다루어져 왔다. 그만큼 희빈 장씨의 스토리가 극적이고 흥미롭기 때문일 것이다.


 희빈 장씨는 조선왕조에서 궁녀 출신에서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무이한 여인으로, 외모에 관한 묘사가 별로 없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미모를 인정한 몇 안되는 여성이다. 대부분의 매체에서 장 희빈은 출중한 미모로 왕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조강지처를 박대하게 만든 악녀로 묘사되고 있는데, 기존의 왕후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후가 되었다고 무조건 악녀라고 볼 수만은 없다. 희빈 장씨가 사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서인 쪽 세력 숙빈 최씨의 주장일 뿐이고, 서인들이 쓴 [인현왕후전]에서 희빈 장씨를 매우 악녀처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 장 희빈의 아들 경종(서인 세력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다) 또한 재위기간이 길지 못했고 최 숙빈의 아들 영조가 뒤를 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정치적 희생양, 희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장옥정]은 이런 희빈 장씨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린 소설로써, 고등학생 때 처음 읽게 되었는데 정말로 장희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주며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던 책이다.

그전까지 내가 생각했던 인현왕후의 순진무구한 이미지, 여자에게 휘둘리는 숙종, 그리고 나쁜짓 하다가 천벌받는 장 희빈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졌다.

'아,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악녀의 이미지는 사실이 아닐 수 있겠구나. 사실이 아니라면 장씨 여인은 죽어서도 영원히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이구나.'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쳐지나가게 만들었고, 장옥정이라는 여인의 기구한 삶이 너무 안타까워서 슬퍼졌다.

 내가 읽은 감명깊은  소설 중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TOP 10 안에 드는 책이었는데 뜻밖에 2013년에 SBS 24부작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장 희빈의 역할이 내가 좋아하는 배우 김태희여서 더 맘에 들었다. 드라마까지 나왔으니, 심지어 장옥정 역이 김태희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도 장옥정이라는 불쌍한 여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겠지? 너무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을 자제하겠지?하는 마음에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를 보고 "역사 왜곡이 심하다.", "장 희빈은 악녀 이미지인데 너무 잘 살리지 못했다."는 혹평을 하곤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 中



 나는  드라마'장옥정, 사랑에 살다'와 소설[사랑에 살다, 장옥정]은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한 여인의 관점에서, 남인 vs 서인 vs 왕(숙종) 구도의 세력 다툼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다가 모두에게 버려진 희생양의 관점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숙종(이순, 제19대 왕)은 드라마에서 늘 여인네들의 암투에 놀아나는 매력꽝에다가 팔랑귀를 가진 왕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붕당정치 환경속에서 무너져가는 왕권을 잡고자 3번의 환국정치를 일으키고, 여인들을 내세운 세력 다툼에서 도리어 그 여인들을 이용하여 신하들을 통제했던 냉정하기 그지 없는 왕이었고, 약 45년의 나름 긴 재위기간을 가진 왕이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명성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통치를 시작했으며, 나이 많고 노련한 대신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성장해왔다. 아버지 현종의 무력함을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 체력 좋고 열정이 충만할 청소년기-청년기 시절 모두 왕으로서 있었던 탓인지 신하들을 휘어잡기 위한 카리스마와 의지가 대단했다.

환국정치와 왕후 교체를 통해 탕평을 하고자 한 숙종

남인과 서인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후의 교체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강력한 유교사상을 지닌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왕에게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제아무리 출중한 지도력과 외교적, 정치적,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한들 왕의 자리에 대해 명나라와 신하들이 인정해 줄 만한 정당성이 없다면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 정당성이란 당연히 왕의 정비가 낳은 아들, 적자와 첫번째 아들, 장자의 조건, '적장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역대 왕을 통틀어서 보아도 그러한 적장자의 조건을 갖춘 왕은 8명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8명 중에서도 단명하거나 쫒겨난 임금이며, 이를 제외하면 현종과 숙종 2명인데 현종은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의 아들이기에 더욱 정통성을 따지자면 숙종이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 정1품 빈, 그리고 왕비까지 올랐던 장옥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장옥정이 궁녀였다고 해서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양반 바로 밑의 신분인 중인 신분으로서, 궁녀 중에서도 중인 신분이라하면 꽤 높게 쳐주기도 했다. 

 장옥정의 부친은 역관이었고, 대대로 역관 집안이었는데 장옥정의 숙부는 장안 최고의 거부 '장현'이었다.

당시 역관들은 자신들만의 통역 능력으로 수입을 올려왔고, 중국 등 해외에 한번 다녀오면 대외정보를 수집하여 돈을 벌기도 했으며 특히 해외 무역으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국가에서는 조선 역관들에게 '면세'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했었기에 역관 중에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인물들이 많았다. 

 장옥정은 바로 당대의 엄청난 재벌 사업가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거에도 많은 돈을 가진 이들에게 정치세력이 붙기 시작했다. 서인 세력은 이미 궁궐에서 실세를 잡고 있었기에 남인들이 엄청난 부를 소유한 역관들에게 많이 붙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장옥정의 숙부 장현이다.

 장옥정이 어렸을 때 부친이 사망하자, 숙부 장현이 거두어 자신의 딸로 입적시켰다. 장현은 빼어난 미모를 가진 옥정을 자신의 딸로 입적한 후 궁녀로 입궁시켰고, 옥정은 궁녀로서는 늦은 나이에 입궁하여 바로 대왕대비전의 지밀나인이 되는 파격적인 특혜를 누렸다.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대비는 인조가 43세 때, 14세의 나이로 왕비가 된 인물로, 귀인 조씨에게 밀려 찬밥 신세로 지내다가 효종 사후에는 예송논쟁에 휩싸이며, 말년에는 막강한 명문가에 성격도 괄괄한 손자 며느리 명성왕후의 기에 눌려 지내고 있었다. 궁녀가 된 장옥정은 외로운 장렬대비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총애를 받았다. 대왕대비전에 있으니 숙종이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올 때마다 자연스레 눈에 띄었고 결국 승은을 입게 되었다.


 장옥정을 조선 최고의 여인으로 만들어준 숙종은 곧 민심의 반대에 부딪혔다. 유교의 국가 조선에서 본처를 내치고 첩을 본처 자리에 앉힌 꼴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숙종이 왕후 교체를 명목으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물갈이하는 시도를 했으나 남인들이 생각보다 능력이 없었고 주제를 모르고 날뛰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를 잘 맞춰 서인의 대표 주자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가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폐비 민씨 복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의 장희빈과 숙종의 대사이다.

 "전하.. 정녕 신첩의 손을 놓으려 하십니까" 

 "손을 놓는다고? 과인이 옥정이 너의 손을 놓지 않으려 이리 애를 쓰고 있는데!!" 

 남인세력에 큰 실망감을 안고 흔들리는 민심에 위기감을 느낀 숙종은 폐비를 다시 복위시킨다. 하지만 민씨를 복위시키면서도 옥정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정 1품 빈의 자리에 앉힌다. 





 장 희빈 스토리의 또다른 주인공 인현왕후는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운 삶을 살다가 간 한 많은 여인으로 기억된다. 물론 안타까운 삶을 산 것은 맞지만 이는 장 희빈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두 여인은 당파싸움의 피해자였고 최후에 서인 세력이 살아남아 인현왕후를 좋은 말로 포장해주어서 후대에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길이길이 남은 반면, 희빈 장씨는 죽은 후에 희대의 요부로 꾸며져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인현왕후에 대한 오해 첫 번째는 숙종의 조강지처라는 사실이다. 조강지처란 힘든 시절부터 고난을 함께 겪은 첫 아내를 말하는데 인현왕후는 숙종이 이미 왕위에 오른 후에 맞이한 두번째 왕후, 계비이다.  조강지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자 시절부터 함께 했던 동갑내기 첫번째 부인인 인경왕후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함께 했던 인경왕후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실권을 잡고 있었던 서인의 실세 민유중의 딸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정상적인 간택 절차가 아니라 필시 어떠한 이해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숙종의 모친이었던 명성왕후는 서인세력을 대표하는 김우명의 딸로서, 매우 과격했던 성격으로 전해진다. 

또한 명성왕후는뒷배경이 탄탄하고 출신성분이 흠 잡을 데 없이 좋았기에, 당파적 색깔이 강했고 궁내 남인세력의 여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내명부를 서인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인현왕후는 이러한 명성왕후의 지지 아래 손쉽게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선하고 심성깊은 인물로 표현되는 인현왕후

 두 번째 오해는 인현왕후가 마냥 천사같이 착하고, 악랄한 후궁을 배려하다가 뒤통수를 맞고 소박맞아 고생하다가 다시 복위하게 되는 선한 여인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서인 쪽의 궁녀가 쓴 [인현왕후전]이라는 소설의 이야기일 뿐이다. 조선의 실록에서 왕비가 후궁을 매질했다는 내용은 인현왕후가 유일하다. 

 [인현왕후전]에서는 인현왕후가 유교적 인품과 덕을 갖춘 어진 여인으로 그려내고 있으나, [숙종실록]에서는 희빈 장씨가 왕자를 출산하자 시기와 질투로 인해 숙종과 사이가 멀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어쩌면 글솜씨가 뛰어났던 궁녀가 서인 세력의 사주를 받아 과장하여 쓰게된 것일 지도 모른다. 

 오랜기간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정치싸움에 노련한 탓이었을까? 남인세력보다 서인들이 여론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탁월했다고 인정할 만하다.



 서인의 권력자들은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있을 때 슬슬 '대체품'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대체품은 새롭게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무수리 출신 후궁 최씨였다. 그리고 인현왕후가 일찍 요절해버리자 최씨에게 대놓고 들러 붙는다. 

 최씨는 궁녀 출신도 아닌, 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하급 무수리 출신으로서, 권력을 잡기 위한 당파싸움과는 당연히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희빈 장씨처럼 막강한 재력가 역관들의 뒷배도, 인현왕후 민씨처럼 정치엘리트들의 뒷배도 없는 여인이었다. 어쩌면 숙종이 최씨 여인에게 마음을 준 이유는  서인vs남인, 민씨vs장씨의 세력다툼에 지쳐 휴식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정치와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여인이기에 순수한 마음과 호기심으로 가까이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서인들은 젊은 왕보다 좀 더 발빠르고 노련했다. 어느새 최씨에게까지 접근하여 서인 세력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니면 서인들 쪽에서 처음부터 미모가 출중한 궁녀와 무수리들을 차출하여 왕의 곁에 두고 접근시킨 것일 수도 있다. 순서가 어찌됐든, 숙종은 마지막에 치를 떨며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희빈 장씨 사후에 서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후궁에서 왕후로 승격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통과시킨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은 것은 왕비를 저주했다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세자의 생모가 사약을 받는 죄목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더군다나 그 당시 궁궐에서 여인들이 암암리에 굿을 하고 시기와 질투로 인해 저주를 벌이는 것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왕 또한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을 내렸다.

 [사랑에 살다, 장옥정] 소설에서는 "제가 왜 죽어야 합니까. 세자를 놔두고 제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어찌 제게 죽으라 하십니까."라며 사약 명령을 믿지도 못하고 거부하는 희빈 장씨에게 숙종은 "나를 위해 죽어다오, 옥정아. 나를 위해."라고 말한다. 장희빈은 결국 참담한 마음으로 사약을 마신다.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가 요절한 상황에서 실권은 자연스레 남인들을 등에 업고 있는 본인에게 넘어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바로 남인들의 세상이 될 것이 눈에 훤했다. 그것은 숙종이 붕당간 대립을 중재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이 바로 물거품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십여 년간 숙종의 곁에 있으면서 탕평과 왕권 안정에 대한 숙종의 열망과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장옥정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차기 왕이 될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없애야 했다.


 이쯤되면 숙종의 진심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인지 처음부터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할 계획이었던 것인지. 숙종이 인현왕후와 희빈 사이에서 이리저리 밀당을 하고 가끔은 한없이 냉정했던 것은 맞지만 인현왕후보다는 희빈 장씨를 더 사랑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느껴진다. 

 결말이야 어찌되었든 중인 신분의 궁녀 출신 장옥정을 왕비로 만들어주려 노력했고, 희빈 장씨에게 따로 취선당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희빈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을 고민 없이 바로 세자에 봉하기도 했다.

 숙종의 이런 행동을 단지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숙종과 희빈 장씨가 그렇게 애써 지켰던 아들 경종은 보위에 오른 후 4년만에 급사하였고 배다른 동생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경종 독살설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하지만 연잉군(영조)이 올린 게장을 먹은 경종이 급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장희빈 사후에는 남인들이 완전히 실각하고 서인 세력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다. 경종을 지켜주던 아버지(숙종)가 세상을 뜨고, 어머니도 불명예스럽게 자진함에 따라 외가 친척들 또한 몰락하여 왕권을 지켜주는 이가 없었다. 

정쟁의 최종 승리자, 숙빈 최씨

 숙종은 경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전, 숙빈 최씨의 세력 확장을 우려해 후궁과 왕후의 선을 명확히 하여애초에 싹을 잘랐고, 자신이 왕권을 안정시켜놓고 번거롭게 하는 대신들을 다 처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서인들과 손을 잡은 숙빈 최씨도 꽤 야망이 있는 여인이었다. 

 경종이 냉정하고 카리스마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 숙종을 닮았더라면, 왕에 오르자마자 이복동생 연잉군을 제거하든 유배보내든 조치를 취했더라면 급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종은 4년의 재위기간 동안 오히려 이복동생 연잉군을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이제와서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형을 독살하고 왕이 된 동생으로, 천민 어머니를 둔 왕으로 왕권에 많은 불안을 느꼈고 독살설에 대해서는 직접 나서서 해명하기까지 한다. 영조는 자신의 위태로운 출신배경과 즉위과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형 경종의 정통성을 부정해야 했다.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경종과 희빈을 모욕하는 일이 벌어졌고 희빈 장옥정은 점차 희대의 악녀로 굳어져 갔다. 

드라마'동이'에서의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자신은 천민 출신 무수리였으나 정 1품 빈의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 조선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숙빈 최씨는 숙종의 마지막 여인이자 현숙하고 인현왕후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인물로 묘사된다. 인현왕후가 입궁할 당시 함께 들어왔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소설 속의 내용에 불과하다.


 단지 비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희빈 장씨와 맞서기 위해서는 서인과 손 잡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도 없었다. 같은 서인 세력이었던 인현왕후에게 살갑게 대할 수 밖에 없었고 희빈 장씨를 견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이어 왕자까지 출산한 숙빈은 어느새 궐 내에서 탄탄하게 정치적인 행보를 걷고 있었고, 숙종에게 희빈 장씨를 고자질하여 결정적인 한방을 날린다.

많은 이들이 야사로 알고 있으나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인 실록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교지를 내리지 않았더라도 숙빈 최씨는 어차피 왕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왕비의 자리는 온갖 정치적인 고려를 바탕으로 주어지는 자리인데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와는 다른 한미한 집안 출신의 최씨에게 왕비 자리가 주어졌을 리가 없다.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장옥정은 서인들의 소설 [인현왕후전]과 노론 세력의 [수문록]에 의해, 왕위 콤플렉스를 가진 영조에 의해 본처를 모함하여 내치고 자리를 꿰찬 요부로 기록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장희빈], [동이], [조선왕후500년], [여인열전] 등 드라마 대부분에서 악녀로 표현되고 있다. 사람들의 인식 또한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살다, 장옥정] 책에서는 장옥정이 딱히 나쁘지도, 선하지도 않은 평범한 여성이다. 아마 실제로도 장옥정은 질투를 하기도 하고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며 직책에 걸맞는 품위와 예의를 갖추었으면서도 때로는 실수와 과오를 범하기도 하는 그저 평범한 인물, 그리고 정치적 희생양이었을 확률이 높다. 한번 쯤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남인들의 오만과 능력부족으로 인해 남인 세력의 간판이었던 자신을 희생해야 했고, 그것은 지아비 숙종과 아들 경종을 위한 선택이었을테지만 숙종의 탕평책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경종은 미약한 지지세력으로 외로이 죽어갔다. 결국 자신의 희생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 많은 여인들은 여러 명 있겠지만, 그 중 하나에 희빈 장씨가 분명하게 포함되리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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