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숙종과 장 희빈, 인현왕후가 있다면 영국에는 헨리8세와 앤 볼린, 캐서린 왕비가 있다.
많은 영화, 책, 드라마로 다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세계사에 조금의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세계사가 낯설고 특히 중세유럽의 이야기를 복잡해하고 어려워 한다면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5세기 말 잉글랜드(영국) 튜더 왕조 시절은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유럽에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왕국이 세워지던 때였다.
헨리 8세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19대 왕 숙종과 많이 닮았다. 헨리 8세도 숙종처럼 10대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왕비와 외척세력의 교체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여성 편력이 많은 왕'이라는 오해도 받지만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카리스마와 결단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탄탄히 다진 군주로 평가되기도 하는 점도 비슷하다. 숙종과 희빈 장씨는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 '기사환국'과 관련이 있고, 헨리 8세는 정통 가톨릭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영국국교회' 창설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는 중인이었고 아버지는 역관이었으며 마지막엔 사약을 받아 죽는다. 앤 볼린 또한 왕족이 아니었으나 아버지가 외교관이었고 왕비에서 폐해져 참수당한다.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어린 시절부터 약혼하여 꽤 사이가 좋았으나,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볼린'의 등장으로 캐서린 왕비는 외면받게 된다.
앤 볼린은 든든한 뒷배가 있는 캐서린 왕비와는 달리 왕족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궁정에서 교육받아 불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총명했으며 활기찬 성격에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캐서린 왕비의 시녀로 들어오게 된 앤은 헨리 8세의 눈에 들게 되었고 대담하게도 왕비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잠자리를 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이 점이 헨리 8세의 승부욕을 자극하였는지, 왕은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갖은 핑계를 대며 캐서린 왕비를 비난하였다. 당시 유럽은 매우 보수적이었던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한 나라의 국왕이어도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캐서린의 외가 또한 왕가였고 지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당연히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교황청의 부정부패를 알고 있었고 틈만 나면 왕권에 도전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던 헨리 8세는 이 기회에 아예 '영국 국교회'라는 새로운 종교를 하나 만들어 버린다. 교황청과 완전히 따로 가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그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원망을 받으며 앤 볼린은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가 된다. 아들을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에게 앤 볼린은 반드시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했으나, 공주를 낳았으며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다가 왕자 출산에 실패하면서 점점 왕의 신뢰를 잃어갔다. 앤은 캐서린 왕비처럼 굳건한 친정이나 인맥도 없었고 대중의 사랑도 없었기에 급속히 몰락해갔다.
앤 볼린을 제거하려던 세력들은 간통죄와 근친상간죄를 씌워 모함했고 헨리 8세는 앤 볼린의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 호감을 보이던 때였기에 앤을 변호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앤의 자매였던 메리 볼린과 자신의 사이를 주장하며 앤 볼린과의 결혼마저 무효였음을 주장했다. 앤 볼린은 법정에서 자신의 죄목을 차분히 부인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그렇게 왕비가 된 지 약 천 일만에 앤 볼린은 참수되었다. 사람들이 '천일의 앤'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앤 볼린은 장 희빈과 마찬가지로 착한 전처를 쫒아낸 못된 악녀, 하지만 매력적인 악녀 이미지로 기억된다. 실제로 많은 역사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의 이미지도 그렇다.
하지만 캐서린 왕비의 딸(훗날 메리 1세)은 매우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왕비로 기억되는 반면, 앤 볼린의 딸(훗날 엘리자베스 1세)은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에스파냐(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수었던 왕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대표적으로 영화[천일의 스캔들]과 드라마[튜더스]가 있다.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헨리 8세를 둘러싼 권력욕 있는 언니 '앤'과 착한 동생 '메리'의 갈등을 위주로 보여주며 캐서린 왕비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픽션이 많이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앤'이 언니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속에서 메리 불린은 앤 볼린의 언니였다고도 하고, 여동생이었다고도 하며 존재 자체가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영화에서 앤 볼린은 자신의 언니 '메리'에게 관심을 표하는 왕에게 아들을 낳아주겠다며 헨리 8세를 유혹하고, 이혼 후 자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잠자리를 거부하겠다며 순결한 여인을 가장하여 왕을 자극하는 캐릭터이다.
영화의 막바지에는 유산을 반복하여 후계자 생산에 거듭 실패하자 남동생(조지 볼린)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설득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결국 근친상간의 죄는 저지르지 않는다.)
또한 영화에서의 헨리 8세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신하들을 다루는 것에 노련한 왕이 아니라, 여자들에게 반해 집적대고 앤 볼린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드라마 [튜더스]는 앤 볼린 뿐 아니라 헨리 8세 전체의 이야기를 다루며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 캐서린부터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시즌 1부터 4까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 3년 남짓 왕비로 있었던 앤 볼린이 시즌 1~2 모두 등장하기 때문에 얼마나 비중이 큰지를 알 수 있다. (-시즌2 마지막화에서 앤 볼린이 죽고는 아예 지겨워져 안 봤다는 사람도 많다.)
영화[천일의 스캔들]보다는 좀더 역사적인 관점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가고 캐서린 왕비 뿐 아니라 메리 공주, 엘리자베스 공주의 성장과정, 토머스 모어 등 주요 인물들, 잉글랜드의 당시 정치적 상황이 자세하게 나오기 때문에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러브스토리를 보려면 [튜더스]를 추천한다.
앤 볼린의 풋풋한 첫 등장과 헨리 8세의 불타는 사랑,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헨리 8세의 사랑이 어떻게 식어가는지 행동과 말투, 표정에서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