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를 몰고 온 동창들
아버지는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진로상담이 있는 날이면
늘 큰아버지가 학교에 갔다.
큰아버지는
자기가 전교 1등을 했을 때보다
그 아이가 1등을 했을 때
더 기뻐했고,
집안의 자랑인 양
더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그가 다니던 학교는
시골 동네에 있는 평범한 학교였다.
눈에 띄는 우등생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촌동네 안에서의 일이었다.
성적 같은 것은
아이들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했고,
아버지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같이 웃고 떠들었고,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누군가를 내려다본 기억도 없었다.
공부를 잘하던 모범생은
그 시대에 가장 무난한 선택을 했다.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은행에 들어갔다.
안정.
성실.
그의 삶은
그 두 단어로
충분히 설명되었다.
정해진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차곡차곡 올라왔고,
그 과정에서
대체로 칭찬을 받았다.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는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들보다
조금은 더 안정된 삶을 살게 되리라고,
적어도 물질적으로 뒤처질 일은 없으리라고
특별한 근거 없이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전제처럼
그의 삶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었다.
은행에 들어간 지
십 년쯤 되었을 때였다.
과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동창회에 나갔다.
기억 속에서
늘 뒤처져 있던 얼굴들.
성적표에서는
항상 자신의 아래에 있던 이름들.
그들이
그랜저를 몰고 나타났다.
손목에는
눈에 띄게 반짝이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웃는 얼굴에는
조심스러움이 없었다.
그 장면은
어쩐지
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누군가 실제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풍경은
분명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말을 잃지도 않았고,
표정이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 안에 세워두었던 기준 하나가
아주 천천히,
눈에 보이지 않게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들이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
어떤 고생 끝에
그 자리에 왔는지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었다.
그 순간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눈앞에 놓인 현재였다.
만족스럽다고 믿어왔던 삶의 어딘가에서
소리가 났다.
우지끈.
그것은
시기도,
질투도,
뒤늦은 후회도 아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자존심이었다.
다른 길을 상상해본 적 없이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지금의 자리에 머물러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온
우등생의 자존심.
그 단단하다고 믿었던 것이
그날,
아무도 모르게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