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들을 알고 지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울려 지내며 살아가려는 의지가 부족해서 저렇게 의미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들의 참모습을 모를 때 가지고 있던 편견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들이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서 노숙자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법을 가르치면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평소에 하는 전기공사였다. 전기공사는 언제 어디서나 써먹을 수 있는 것으로 호구대책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손을 빌릴 것도 없고 내가 가르치면 되었고 또 어느 정도 가르치면 바로 공사현장에서 직접 실습할 수 있고 실습하면서 바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최적이었다. 어느 현장이든지 사람이 없어 사람 구하느라고 난리였다.
“아이에게 생선을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속담도 생각났다.
마침 우리교회 2층에는 호프집 하던 곳이 비어 있었는데 주인과 임대료 분쟁 때문에 비어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말하고 그냥 빌리기로 했다. 주인으로서도 온갖 쓰레기로 가득 찬 이곳이 눈에 거슬리던 터였다.
쓰레기는 내가 댓가 없이 치우겠다고 했다. 주인이 허락했다. 대신에 임대료 분쟁이 끝나면 곧바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나도 얼마나 계속 사용할 수 있을지 몰랐으므로 그런 조건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실내에서 간단한 교육이 끝나면 바로 나가서 공사 현장으로 직행하면 되었다. 서로가 윈윈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쓰레기를 치우고 내부 정리를 시작했다. 온갖 쓰레기가 어마어마했다. 음식물 찌꺼기도 쩔어 붙어 있었고 고장 난 냉장고에서는 상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짝이 부서진 씽크대를 손보았다. 잠을 잘 수 있도록 여기저기 뚫어진 바닥에 합판을 깔고 장판을 사다 깔았다.
몇 사람은 기거해야 했기에 옷장도 몇 개 필요했다. 마침 근처에 있는 월드컵 APT 단지에 가서 말씀드렸더니 경비 아저씨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중형 APT 단지였는데 작은 집으로 이사 가시는 분들은 큰 가구를 가지고 갈 수 없어서 버리는 것이 있었다. 반면에 집을 넓혀서 오시는 분들은 오래되고 작은 가구들을 버렸다. 침대. 옷장. 쇼파. 어떤 때는 낡은 피아노도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 졌다. 우리 나라가 잘살게 된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떤 것들은 돈을 받고 팔아도 되는 것들도 많았다. 민족 사랑교회 유수영 목사님께 부탁했는데 1톤 트럭과 봉사자들을 보내 주었다. 쓸만한 옷장을 몇 개 옮겨서 준비를 마쳤다.
전기 공사기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을 모집할 차례였다. A4용지에 전기공사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글을 쓰고 연락처로 내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필요한 사람들이 뜯어 갈 수 있도록 전화번호를 여러 개 쓰고 가위질을 해 놓았다. 서울역 광장과 채움터(무료급식소) 주변에 여러 장을 붙였다. 개인적으로는 친분이 있는 노숙인들에게 취지를 설명했다.
<다 잊어버려요>
노숙인 중에 내가 눈여겨 보던 사람 중에는 민학수라는 분이 있었는데 40대 중 후반쯤 되는 나이였다. 덩치도 좋고 가끔 커피 봉사에 참여하던 친구였다. 나는 전에도 그 친구에게 전기 기술을 가르쳐 줄 테니 나와 함께 일하러 가자고 했던 친구였다. 그때마다 그는 “전 못해요” 하며 거절했다.
이번에는 잡잘 곳도 있고 기거할 곳도 마련했다고 꼬뜨렸다. 전기 배우라고. 그러나 그의 얘기를 듣고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
“목사님 저는요 오늘 밤에 들은 얘기를 내일 아침이면 싹 다 잊어버려요.”
“아니 왜? 하루밤 사이에 뭔 일이 일어나는가?”
“목사님이 오늘 가르쳐주면 내일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할걸요.”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보니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일을 갔다 오면 어린 민수를 때렸다. 인사 안 한다고 때리고 인사 똑바로 안 한다고 때리고, 심부름 잘 못한다고 때렸다.테레비 본다고 때리고 공부 못한다고 때리고, 이유가 없이 때렸다.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런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라면 나쁜 짓을 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한다.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자기가 갖고 실은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면서 비행소년으로 자라게 된다. 아니면 바보처럼 늘 맞는아이로 혹은 왕따로 자라게 된다. 이 아이는 맞으면 맞은 것을 잊어버리는 쪽으로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시작했다.
왕따를 당해서 또래 아이들에게 맞아도 다음 날이면 잊어버렸다. 아버지에게 맞아도 밤이 새면 잊어버렸다. 망각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방어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습득했다.
훗날 다 자라서 공장에 갔는데 잊어버리는 방어기재가 문제가 되었다. 보통은 A.B.C....이렇게 일을 시키면 A.B.까지만 하고 C는 잊어버리고 앉아있고. 이런 일이 반복되니 공장에서 쫓겨나고. 이리저리 여러 공장을 돌다가 서울역 광장까지 내몰린 케이스였다.
처음 지시 사항을 다 잊어버리고 한 두 가지만 기억하는 구조로 그의 뇌가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겠는가? 기억된 것도 하루만 지나면 잊어버렸다.
“안녕하세요?” 하며 웃는 그의 눈속을 들여다보면 깊은 슬픔의 그림자가 보인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빗나간 사랑과 폭력이 아이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그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서울역에서 불공평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나눠줄 때 차례로 나눠주다가 모자라면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냥 흩어진다. 하지만 나눠주는데 앞에서 받고 뒤돌아 서서 새치기 해서 또 받으면 모두가 화를 낸다.
민학수 이 분은 이런 경우 무섭게 화를 낸다. 등에 있는 배낭을 벗어서 땅바닥에 팽개치면서 큰 목소리로 소리 지르며 주먹을 치켜들고 누구하나 죽일 듯이 화를 낸다. 큰 덩치에 사람들이 다 피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차마 때리지 못하고 화만 내는 것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의 특징이며 폭력의 악독함을 아는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이다.
서울역 광장에는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들인데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광장에서 용산 쪽으로 가면 채움터 라는 무료급식소가 있다. 밥때를 맞춰서 급식소에 가면 기독교 공동체에서 주는 밥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
서울역 광장과 대합실 등에서 음식을 먹으면 냄새도 나고 지저분해 지니까 서울시가 궁여지책으로 만든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초기에는 식사를 공급하는 것은 서울시가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봉사대에 맡겼다. 가서 줄만 서 있으면 밥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급식소의 위치를 모르거나 시간 관념이 없어서 광장에서 굶는 사람들이 있다.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밥 먹으러 가면서 그런 사람을 데리고 가서 같이 먹으라고 권한다.
이런 사람들은 범죄자의 밥이다. 동사무소에서 어찌어찌해서 수급자로 만들어줘도 다른 놈이 카드까지 빼앗아간다. 그래도 이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광장 한구석에서 굶주리고 있다.
서울역 지하도에는 의과대학 학생들이 매주 토요일 마다 와서 무료 봉사를 한다. 진찰을 하고 간단한 약도 준다. 지적 장애인들은 이런 것조차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피부병같은 것을 몸에 달고 다닌다. 씻지 않고 약 받으러 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일부 몰지각한 젊은이들 중에는 이들을 무조건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하기 싫어서 노숙자 생활을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일하기 싫어서 노숙생활하는 자들은 이들 어리석은 사람들을 갈취해 먹는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멀끔하게 차려입고 광장을 배회한다. 어리숙한 노숙자를 등쳐먹으려는 자들이다. 정말 거지같이 보이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요>
전화로 상담해서 온 사람이 있었다. 박운재라고 했다. 40대 후반에 대학 경영학과도 나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전기 노가다를 배우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전기를 배워서 혼란스러운 자기 자신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오라고 했다. 집주인과 임대인 간에 문제가 해결되어서 내가 하던 홀로서기 프로그램을 접어야 할 무렵이었다.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내가 쓰던 교회의 작은 서재를 내주었다.
처음 볼 때 이분은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좋으면 너털웃음을 짓고 명쾌했다. 같이 공사 현장에 가서 실습하면서 일을 배우기로 했는데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너무 의욕이 앞서서 내가 감당이 안 될 때가 있었다.
공사 현장에는 여러 분야가 어울려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각자 맡은 부분만 하면 된다. 그는 전기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가서 찝적거려 그들의 불만을 샀다. 과도한 명랑함으로 사람들의 안정을 흩으렸다. 나는 잘 못 느꼈는데 다른 사람들을 은근히 기분 나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불평 때문에 결국 더는 같이 있지를 못했다. 내 일까지 지장이 있었다.
나는 그를 용역회사에 소개시켜 주었다. 서울 지하철에 전기공사를 하는 회사였다. 이분에게 맡겨진 일은 4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하는 일이었다. 터널을 따라서 전기 배관용 파이프를 벽에 고정시키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한 열흘쯤 일하더니 더는 못 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방끈이 긴 사람이 단순 육체노동을 못 견뎌서 그만두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도 머리 속에 들어있는 먹물의 양이 많아서 못 한다고 하는 줄로 생각했는데 그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왜냐고 하니까 자기 조장이나 자기나 똑같은 일을 하는데 조장이 자기보다 더 받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조장은 그만큼 경험도 풍부하고 일에 대처하는 능력도 더 났다. 다른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받는 것이라고 해도 이해를 못했다. 자기는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일하는데 조장은 자기보다 훨씬 적게 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현장에는 안 간다고 버텼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그와 함께 일을 하러 갔는데 일하는 도중에 없어졌다가 30분쯤 후에 왔다. 어디 갔다 오느냐고 짜증을 냈더니 자기가 좋은 일을 맡았다고 좋아했다. 내일은 자기가 맡은 일을 할 것이라고 해서 뭐냐고 물었다.
작업현장에는 우리가 등을 달아야 할 곳 말고도 다른 창고가 있었다. 이번 일에 창고는 빠져 있었다. 주인이 하는 말이 그곳 창고에는 다음에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일하는 김에 그곳에 등 열 개를 달아 달라고 했단다.
“그거 잘 됐네. 이거 끝내고 바로 이어서 일하면 되겠네”
“이 일은 제가 맡았으니 제일이죠”
“그게 뭔 소리여?”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일하고 결제도 제 앞으로 해야죠.”
나는 어이가 없었다. 보통 일을 맡아서 들어오면 그 일의 연장선에서 추가되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연장선에서 일하고 추가로 발생한 돈을 받는데 당연히 처음 일을 맡은 사람이 책임을 지고 일을 추진한다.
주인은 누가 반장인지 모르기 때문에 작업원 중 한 사람을 불러서 지시를 하고 반장에게 전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진행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에게 준 일이니까 자기가 받는다고 우겼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에서 차이가 나면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사람들과 계속 부딛쳤다. 게다가 가방끈이 기니 자기가 가진 의견이 옳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
이 분은 어렸을 때 부모님의 편애 때문에 인간관계의 정상적인 면이 틀어진 경우였다. 이분은 부모와 할머니가 계셨고 형이 하나 밑으로 동생들이 여럿이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편애하셨다. 어머니는 존재감 없이 밥하고 일만하는 그런 존재였다.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도시에 집을 사서 유학을 보냈다. 아버지는 형이 시골집에 오는 것조차 막으시고 공부에 집중하도록 했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 반면 둘째 아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G대학 경영학과에 자기 실력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큰 아들은 없는 듯이 여기고 둘째 아들만 싸안고 돌았다.이집의 기둥은 너라고 부축였다. 이분의 표현을 빌리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형이 군대가기 위해 집에 왔을 때에야 비로소 형의 존재를 알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 이 집의 기둥은 작은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둘째가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을 정도로 편애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당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위 아래가 바뀐 꼴이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형을 편애했다. 오랫동안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눌려 지내던 어머니는 형의 대변자였다. 형이 결혼한 후 형수가 들어오고 나서 형제간의 뒤틀어진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어머니와 형수는 하나가 되어 아버지를 대적했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끼고 돌았지만 이미 작은 아들은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정상적인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대도시 근교에 있는 이 집의 논밭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수십억의 재산이 되었다. 집안의 문제는 더욱더 꼬여만 갔다.
이 친구에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이 옳은지 어머니의 말이 옳은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 이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사회생활은 이 사람의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사회생활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책임감과 과도한 질책은 이 사람을 사회로부터 분리했고 그렇게 떠돌았다.
몇 년 후에 우연한 기회에 이분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전화를 했더니 반갑게 받아준다. 지금은 무엇을 하냐고 물어보니 아파트 관리실에서 근무를 한다고 한다. 지금 몇 년 되었다고 하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내가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보이스 피싱 수거책>
이 분은 지방에 나이 드신 어머니와 아들이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날 찾아 왔다. 이 분은 목에 힘을 주고 말하는 그런 탸입이었다. 전기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50대 후반의 분이었다. 나는 평소에 전기는 나이가 들면 배우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분을 받아주었다. 배우겠다는 생각이 고맙지 않은가 하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런데 막상 가르쳐보니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이분을 가르치고 복습을 시켰다. 조금만 복잡한 것을 가르치고 연습하라고 시간을 주면 방금 가르친 것을 구현해 내지 못 했다.
이 분뿐만 아니라 연세 있는 분들을 가르쳐보면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나이가 들면 배우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배운다고 열심히는 하는데 진전이 없었다.
아래층에 오토바이 수리 가계가 있다. 이 가계 주인이 이 분과 비슷한 연배였는데 한 번은 그러더랍니다.
“내가 지금 이걸 배워서 무얼 하겠어요? 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 그냥 있는 거지”
나는 그래도 내게 와서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었음에 감사했다.
얼마 안 있어서 가계 비워달라는 주인의 요구가 있어서 이 분을 내보냈다. 얼마 후 서울역에 찾아와서 수원에 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다고 해서 빌려줬다. 얼마 후에 날 찾아와서 빌려 간 돈을 갚았다. 그 후에도 빌려가고 갚기를 여러 번 했다.
이 분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서 웬일인가 했다. 그렇게 내 머리에서 잊혀질 때쯤 되어서 서울역 광장에 다시 나타났다.
“어디 갔다 왔어요.? 한동안 안 보이더니.”
“유치장 갔다 왔습니다.”
“웬 유치장이에요?”
“어떤 놈이 돈 좀 받아오라고 해서 돈을 받으러 갔다가 잡혔어요.”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보이스피싱 수금책을 하다가 잡혔던 모양이었다.
서울역에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몇 푼 주고 주민증 빌려다가 대포폰 여러 개 만들어 팔아먹는다. 저소득층 수급증 만들어서 대신 타 먹기도 하고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곳이다.
성제구도 이런 무리들 꾀임에 너머가 시키는 대로 한 모양이었다. 순진한 사람 또 하나 범죄자를 만들었다. 얼마후에 목에 붕대를 붙이고 나타났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목 디스크 때문에 수술했단다. 이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을 상실했으니 앞날이 막막하다고 씁쓰레했다.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다.
<너무 착해요>
김길후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밑에서 자랐다는데, 전화를 했기에 오라고 했다. 삼촌 밑에서 전기를 조금 배웠다고 했는데 도무지 의욕이 없었다. 뭘 가르치면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제대로 했지만 어떤 때에는 잘 못했다.
이 사람이 나를 질색하게 하는 것은 가게에서 물건을 사 오면 포장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닐봉지를 옷장 구석구석 서랍마다 쑤셔 박아 놓았다. 잔소리를 해도 그 때 뿐이었다. 도무지 버리는 걸 못했다.
김상진이라는 사람은 동대문 시장에서 제법 큰 니트 가계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이분은 도박에 빠져서 집에서 쫒겨난 몸이었다. 결국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이 사람의 독특한 것은 술만 먹으면 발밑에 걸리는 것은 다 발로 차버리는 습성을 갖게 된 점이었다. 깡통도 차고 병도 차고 먹다 말고 버린 플라스틱 밥그릇도 차고 국그릇도 찻다. 프라스틱 도시락을 걷어 찻는데 바로 지나가는 젊은이가 맞았고 음식물을 뒤집어 썼다. 이 사람도 젊은이에게 뒤지게 걷어 채였다.
그가 고시원에 방 하나 얻어 달라고 내게 찾아왔다. 하도 간절해서 없는 돈 털어서 방 하나를 얻어주었다. 다음 달에 방값을 내려고 갔더니 한 달 동안 겨우 첫째 날 하루만 잤다는 주인의 말이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만나서 궁둥이를 발로 걷어 찻더니 변명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마도 알콜치매 때문에 방을 빌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인간이 이렇게도 망가질 수도 있구나 하고 슬펐다. 얼마후부터 이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요양원 같은 시설에라도 잘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후로 홀로서기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하지 않았다. 성과도 없었고 나는 나 대로 지칠 뿐이었다. 노숙자들은 아무런 소망도 기대감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었다. 대신에 토요일마다 서울역 광장에서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능하다면 먹거리라도 최선을 다해서 풍성하게 먹이고 천국에 구원의 소망을 두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은 땅에 발바닥을 붙이고 아스팔트를 베개로 삼더라도 천국에 간다는 구원의 소망을 갖는 쪽으로 목회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방향 전환은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 이제까지 나는 목회에 대한 콤프렉스가 있었다. 같은 시기에 개척한 다른 사람들은 교회가 잘 성장해서 재미있게 목회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교회는 성장은 고사하고 겨우 가족끼리 예배드리고 있었다. 매일 노가다 일이나 다니는 꾀죄죄한 목사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목사라고 스스로 소개하기도 부끄러웠다.
이때부터 나의 목회지는 서울역 광장이라고 생각했다. 노숙자들이 내 성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울역 광장에는 매일매일 많은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이 나와서 노숙자를 대상으로 예배를 드린다. 이들과 공동목회를 한다는 생각으로 노숙자들을 섬기기로 했다. 큰 교회에 많은 목사가 있는 것처럼 나도 여러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열정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더 많이 섬기기로 마음 먹었다.
“땅바닥에서 하늘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