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압구정역 위에는 동호대교로 올라가는 고가도로가 있다. 고가도로 아래 공간에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으로 횡단보도가 있다. 지하에는 지하철 3호선의 압구정역이 있다. 조선 시대 세조가 등극하는데 일등공신이 된 한명회가 세운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근처에 있다고 이름 지어진 역이다. 지금은 헐리고 정자가 있던 자리에는 비석만 남아 있다고 한다.
나는 이곳 횡단보도 앞에서 고가도로를 정자의 지붕 삼아 모금을 한다. 이곳은 사람의 통행량이 상당히 많은 곳이다. 중 고등학생들이 학원 가려고 거치는 길이기도 해서 학생들의 동전이 많이 모금된다. 숫자로 보면 어른보다 훨씬 많은 학생이 모금에 동참해 준다. 어떤 학생들은 손뼉을 쳐주기도 하고 파이팅을 외친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용기를 모금해 준다.
그런가 하면 외국인들도 모금해 주는 데, 중국의 위안화가 들어 있기도 하고 달러가 들어 있기도 하다. 한 번은 몇몇 아주머니들이 빙 둘러서서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뭐라고 하는데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갈 때는 모금도 해주고 함박웃음을 띠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주고 갔다. 음악은 모든 인류의 공통언어인 모양이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과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모금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찬양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셔서 말을 거신다. 자기 아들이 작년 이맘때 천국으로 갔단다. 그제야 아주머니의 눈에 눈물 자국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주 건강한 아들이었고 똑똑한 아들이었단다. 서울대 대학원에 막 들어갔을 때쯤 병을 얻었단다. 핸드백에서 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훔치며 말씀하신다.
“백혈병이었어요.” 현대의학도 아들의 병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아들은 꼭 쥐었던 엄마의 손을 놔두고 하늘나라로 갔단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내게는 외숙모 한 분이 계신다. 외갓집은 어머니가 맏딸이었고 열다섯 살의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었다. 외숙모는 이 외삼촌의 아내인 셈이다. 나는 어머니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나를 낳을 때 어머니는 30대 중반이었고 건강이 심히 안 좋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젖을 제대로 못 얻어먹었다. 전쟁 바로 직후의 우리나라는 가난이 일상이었고 집집이 병객이 하나둘은 있을 때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그때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려 다른 집에 가보면 대부분 집에는 흰 천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분이 있거나 윗방에는 병자가 누웠던 자리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바로 한 해 전에 시집을 오신 외숙모가 나보다 두 달 후에 아들을 낳았고 나는 외숙모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면 나는 어려서부터 입이 짧아서, 입에 안 맞으면 굶더라도 안 먹으려 했다고 한다. 여름이 오면 다리가 배배 꼬여도 보리밥은 안 먹으려 했다고 회상하셨다. 그런 짧은 입의 생명선 역할을 한 것이 외숙모 젖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숙모는 특별히 챙겨 주셨다. 외사촌과 나는 외숙모의 젖을 같이 먹으며 컸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외숙모네는 서울로 이사 갔다. 외사촌이 방학 때 시골 우리집에 오면 산과 들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커서 청년이 다 되었어도 외사촌은 고향과 고향의 친구들을 좋아했고 자주 놀러 왔다. 때로는 자기 친구들까지 몰고 왔다.
봄에 동네 친구들과 칠현산 꼭대기 능선에서 봤던 활짝 핀 진달래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집 근처에 있는 진달래는 홑꽃이 많았다. 회초리처럼 가느다란 것이 삐뚤빼뚤하고 키도 작았다. 칠현산의 진달래는 키가 우리보다 한참 길었고, 줄기도 굵었다. 꽃도 탐스럽게 다닥다닥 핀 겹꽃이 대부분이어서 탄성이 절로 일었다.
한겨울에 미꾸라지 잡겠다고 논마다 쑤시고 다녔다. 발을 잘 못 디뎌 빠지고 양말과 옷을 다 버렸어도 우리는 즐거웠다. 몇 마리의 미꾸라지가 우리를 유능한 어부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외숙모는 손이 귀한 4대 독자 집에 오셔서 아들 셋에 막내딸 하나를 낳으셨지만 박복하셨다. 우리가 스무 살 되던 해에 외숙모는 남편을 잃었다. 그때 외삼촌의 나이는 마흔다섯이었다. 그보다 십 년 전에는 둘째 아들을 한강에 놀러 갔다 심장마비로 잃었다. 모래 채취를 하고 메우지 않은 깊은 웅덩이가 아들을 빼앗아가 버렸다.
시골에 남겨 놓은 논밭이 조금 있어서 밥 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려운 생활이었다. 우리는 군대에 갔고 동생들은 아직도 어린 학생이었다. 우리의 바로 아래 동생 외숙모의 셋째 아들은 키가 작고 몸이 연약했다. 아이를 배 속에 가지고 있을 당시 외숙모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일찍 낳아서 그렇다고 외숙모는 늘 아쉬워했다.
그래도 동생은 생활력이 강해서 스스로 돈 벌어서 전문학교까지 마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동생이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우리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동생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외숙모의 극진한 간호에도 별 차도 없이 동생은 하늘나라로 갔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이었다.
지금도 애통해하던 외숙모의 모습이 선한데, 그때 그 외숙모의 나이가 될법한 아주머니의 슬픔을 위로할 말이 없다. 의술이 발전하면서 젊어서 사별하는 일은 적어졌지만, 혈육을 죽음으로 잃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아주머니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더니 내 손에 꼭 쥐여 주신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서신다.
행인들의 머리 사이로 그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분이 주신 돈을 꼭 쥐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눈물이 되어 젖어버린 지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