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소리가 이상했다.
찬양시간에 맞춰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하게 예배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디의 음정이 낮아지는 것 같았다, 기타 소리가 튕겨 올리듯 불협화음을 냈다, 찬양을 중단하고 반주하는 성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수의 얼굴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반음이 떨어져요.”
뭔 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성수를 바라보았다.
“신디가 이상해. 음이 반음이 낮은 소리가 나와.”
이 건반 저 건반을 한 손가락으로 팅팅거리며 성수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사람 손으로 조율하는 피아노가 아닌 전자피아노가 음이 틀릴 리가 있나 했다. 조금 전 예배 시작할 때 기타 음을 맞추던 악기였다.
선수에게 음을 쳐 달래서 조율을 다시 했다. 전체적으로 반음 내려간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조율을 끝내고 찬양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찬양을 시작하니 목소리가 약간 이상했다. 늘 찬양하던 음정을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가 적응을 제대로 못 해 악기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이제는 목소리에 신경을 써서 악기에 맞춰야 했다.
내 고향은 충청도 시골이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두 분의 형님과 누님이 한 분, 밑으로는 남동생과 막내로 여동생이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형님들과 누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특히 세 살 차이였던 누님은 보디가드였다. 누님은 학교를 한해 늦게 다녀 동기들보다도 덩치가 컸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공부는 곧잘 했기 때문에 나이 차이 크게 나는 형님들도 많이 귀여워해 주었다.
나는 비교적 조용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뭔가를 뚝딱거리며 만들기를 좋아했다. 톱 망치 이런 것들이 장난감이었다. 지금도 왼손 엄지손가락 위에는 한줄기 흉터가 있는데 어렸을 때 생긴 것이다. 톱질하다가 손가락을 긁어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나무를 자르고 못질을 해서 마차를 만들었다. 못도 귀하던 때라 아버지가 집 기둥에 호미나 망태를 걸어 놓으려고 박아 놓았던 못을 전부 뽑아다 썼다. 동네 골목길에서 동생들을 태워주던 것이 생각난다. 너무나 잘 만들어서(?) 동생들을 태워서 끌고 가다가 바퀴가 빠지고 앞부분이 부서져서 동생들도 나동그라졌다. 엎드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던 어른들이 “제법 잘 만들기는 했네” 하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럴듯한 재주(?)가 있는 내게도 음악 미술 체육은 언제나 난공불락이었다. 그때 성적표에는 늘 ‘양’과 ‘가’였다. 6학년 내내 ‘양호하다,’ ‘가능성이 있다’라는 평가였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음치는 자신이 음치인 것을 자신만 모른다고 했던가? 아무튼, 젊은 시절에 면 소재지에서 열리는 노래자랑 대회엔 기를 쓰고 참가했는데 예선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심사위원들을 탓했다.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기타를 치며 찬양 인도를 시작했다. 50세에 신학을 시작했고 53살에 개척을 했다. 큰아들이 드럼을 치고 작은아들이 건반을 맡고 내가 기타 겸 보컬이었다 유일한 회중은 아내였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찬양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들들이 내 찬양과 기타에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박자는 내 멋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고무줄이었다. 기타도 신학교에 가서 배우고 연습한 완전한 초짜였다. 그때 우리 찬양 대의 성적은 ‘가능성’이었다. 피아노가 전주를 하고 첫 박자에 찬양이 들어가야 하는데, 때를 놓치기 일쑤였다. 내가 음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찬양 대의 기타 겸 보컬로 대활약(?)을 하고 있다. 그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했을까? 당연히 아니올시다.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찬양 대를 그만두고 싶다. 30분의 찬양에도 어깨와 팔은 그만 써먹으라고 비명을 지른다. 뇌경색 치료 이후에 목은 신소리를 내고 머리는 조이는 듯하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직도 음치에 가까운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을 듣고 싶어서 하시나 보다. 후임자를 안 보내시는 걸 보면. 멤버도 오히려 줄었다. 큰아들이 장가를 들어 분가했다.
6학년 때 친구가 오르간에 앉아서 당시에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을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이에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꼭 오르간을 연주하리라. 내가 음치라는 것을 몰랐고 친구의 멋진 모습만이 머리에 들어와 꽂혔다.
음악이 6년 내내 ‘가’라는 성적을 받았는데도 이 성적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조를 잘 읊으셨다. 가끔 따라 했는데, 내 딴에는 제법 잘하는 것 같았다. 역시 음치는 자기가 음치인 것을 자기만 모른다는 말은 진리인 것 같다. 연주를 잘해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은 열망만 있었다.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는 악기를 만질만한 형편이 못되었어도 꿈만은 변하지 않았다. 청년이 되어서 가끔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만져보고 띵띵하기도 했지만, 환경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젊었을 시절에는 기타 치며 노래하는 포크송이 온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었지만, 이것 또한 그림의 떡이었다. 기타를 만질만한 형편이 전혀 안 되었다. 악기는 오랜 시간 동안 투자해야 하지만, 시간도 물질도 없었다.
늦은 나이에 신학생이 되었어도 여전히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빚도 많았기에 낮에는 일해야 했다. 다행히 기숙사에는 기타가 있었고 빈방도 있었다. 오랜 세월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과 수업으로 바쁜 가운데도 짬을 내서 기타 연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4학년이 되어서 전교생 채플 시간에 내 인생 가운데 처음으로 기타를 들고 독창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떨었던지! 피아노를 반주하는 학우가 같이 연주를 해서 처참한 실력을 덮어 줬는데도 어떻게 했는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내 무모함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개척하고 아이들과 합주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갔다. 연주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기타를 잘 치고 노래를 잘해서 붙는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버스킹을 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호스피스 과정에 등록했다. 호스피스 봉사자가 되고 싶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10주 동안 참석해야! 했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7주만 참석했고 수료를 못 했다. 그랬어도 현장에서 봉사하고 싶었는데,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나이가 있고 서투른 초보였다. 다른 분들이 같이 일하기를 모두가 어려워했다.
같이 일하기 어렵다면 혼자 하리라. 호스피스 봉사보다는 호스피스 봉사를 도와주는 봉사자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앰프는 서울역에서 쓰는 것을 쓰고 기타는 교회 것을 썼다. 형편없는 기타 연주 실력을 감추기 위해 반주기를 같이 사용했다. 일주일에 세 번을 했다. 압구정역과 교회 앞의 불광천 변에서, 화정역에서 하면서 소아암 환자 돕기 모금함을 가져다 놓았다.
몇 년 했었는데 모금도 꽤 많이 해서 세브란스에 가져다주고 강남구청에도 한 번 보냈다. 압구정역이 강남에 있어서 압구정역 앞에서 모은 모금액을 입을 싹 씻기는 거식해서 한번 인사치레했다. 찬양과 기타 연주는 언제나 어려웠다. 길거리 소음에 묻혀 바닥인 실력을 감추긴 했어도 내가 생각해도 지금도 창피하다.
내가 하는 일은 실내 장식 전기공사였다. 서울 외곽의 위성도시 위주로 일거리가 들어오다 보니 출퇴근의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점점 버스킹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졌다. 그렇게 길거리를 떠도는 약장수 노릇은 접게 되었다.
나중에 여동생이 내가 기타 치며 노래하는 길거리 버스킹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하는 말.
“오빠가 노래한다고? 음치가 노래해?”
지금 은퇴할 때가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은 꿈을 꾼다. 교회에 신디가 있지만, 연습할 시간이 없다. 목회하랴 일하랴 서울역 노숙자들 섬기느라. 늘 시간에 쪼들린다. 신학교 들어간 이후에는 일 년 열두 달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은퇴 후에 시간이 나면 그때는 피아노에 도전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