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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Feb 07. 2024

6. 아빠를 품에 안고 오르는 길

유골함은 뜨겁고 무거워서 그걸 끌어안은 나는 계속 휘청였다

0. 애도의 자격

1. 참을 수 없는 생명의 가벼움

2. 장례는 유족을 위한 절차가 아니다

3. 곡소리는 영혼을 토해낸다

4. 겨울바람, 플라스틱 꽃, 외로운 사람

5. 아빠 인생 일대의 원수가 조문을 왔다




외삼촌들이 내게 장례 방식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셨다. 엄마는 수목장을 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먼 훗날을 생각하면 납골당에 안치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망설였으나 결국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말했다. 둘째 외삼촌께서 아시는 분 중 우리가 사는 시 내에서 수목장 관련 땅을 취급하는 분이 있다고 하셨다. 삼촌과 이모가 땅을 보고 오셨고, 풍수지리 등을 언급하며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아빠를 묻어야 하는 게 맞나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모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말했지만 그게 누구를 달래는 말인지는 없었다. 친가분들께도 수목장으로 진행하기로 했고, 이모가 땅을 보고 왔는데 괜찮다고 하셨다 말씀드렸다. 




세 시간 같기도, 삼 년 같기도 한 삼일장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식을 마무리하고 화장터로 이동하기 전 '육체'라는 껍데기를 입은 아빠를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때였다. 장례 중 이런 절차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일러줄 때마다 쇼크처럼 솟아오르는 스트레스로 나는 이미 통제감이라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우리는 아빠가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복도가 길고 좁았다. 걸어가는 길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방 안에 누가 있었는지 한 명 한 명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사람은 우선 나, 엄마, 엄마보다 더 오열하던 엄마의 직장 동료, 작은 아빠, 막내 삼촌, 아빠와 친했다던 그 A상무. 할머니는 충격을 받으실까 봐 동행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마지막으로 본 병원에서의 모습보다 더 부어있었다. 처음 전화를 받고 발견한 그 중환자실에서 누워있던 아빠의 모습을 찍었을 때, 나는 어쩌면 이것이 살아있는 아빠의 마지막 사진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느꼈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장례지도사가 아빠의 덩치를 두고 옛날이었으면 장군감이다, 몸이 크셔서 관을 새로 맞춰야 했다며 일방적으로 떠들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빠는 185cm로 아빠 세대의 남자치고 키가 많이 큰 편이었다. 나는 170cm가 조금 안 된다. 어릴 때는 뒷자리에 앉는 게 싫어 큰 키를 원망했고, 나이가 좀 들고는 딱 알맞게 멈춘 키가 좋았다. 아빠는 항상 내가 조금 더 클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나는 이런 사소한 것들로 평생에 걸쳐 얼마나 아빠를 생각하게 될까.


엄마가 울면서 아빠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장례지도사가 엄마를 물렸다. 


"왜... 왜 만지면 안 돼요?"


엄마가 울먹였다. 나 같으면 무시하고 만졌을 텐데(실제로 무시하고 만졌다). 혹시 만지면 안 된다는 미신이 있거나 아빠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인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유순하게 묻는 엄마가 미련하고 안쓰럽고 애틋했다. 장례 지도사는 염을 했으니 만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균이 묻을 수 있어 아빠에게 좋지 않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아빠의 얼굴께를 한 번 더 쓰는 걸 놔두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작은 아빠가 아빠의 얼굴을 만지시길래 그 손도 치워냈다. 작은 아빠는 이걸 내가 그분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쳐냈다고 기억하신다.


"OO아빠, 잘 가. 미안해. 사랑해."


엄마가 말했다. 


"아빠. 아무 걱정 하지 마. 괜찮아. 수고 많았어. 엄마는 내가 책임질게. 내가 보란 듯 떵떵거리면서 살게. 아빠가 하고 싶었던 거 내가 다 하면서 살게. 잘 가."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선언이라고.


작은 방. 그곳엔 우리 모녀에게 정을 떼기 시작한 작은 아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빠의 측근들도 있었다. 모두가 3일을 내리 봤으면서도 데면한 상태로 서로를 경계했고, 나는 내가 아직 아빠의 죽음과 함께 닥쳐올 것들을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 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발악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언령이라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웅변했다. 겁먹은 개가 큰 소리로 짖는 것처럼.


무서웠다. 그리고 아빠에게 너무 미안했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세상을 떠나는 아빠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건지 알지 못하는데.




나는 장례식장 앞으로 도착한 리무진에 타 있었다. 조수석엔 내가, 뒷자리엔 엄마와 할머니가 앉으셨던 것 같다. 새벽이었나, 이른 아침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세계는 멈추었으니 시간 같은 건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몹시 피로했던 것만 기억난다. 초연하고 고요했다.


나는 흰 장갑을 끼고, 아빠의 영정사진을 품에 들고 아빠의 회사에 내렸다. 네이버 지도로 몇 번 쳐보기는 했으나 직접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야 아빠가 일하는 곳을 들어와 보는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일반 회사에 가까웠다. 아빠의 개인 사무실에는 엄마와 내가 질색하는 장식품들, 간단한 트레이닝 도구들이 있었다. 나는 회사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리무진에 올랐다. 아빠의 회사는 우리 집에서 20분 조금 넘게 떨어져 있다. 어딜 가나 아빠가 보이는 이 동네에서 엄마와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가는 동안 그것이 바래고 잊혀질까. 그건 더 나쁜 게 아닐까. 머리 아픈 고민들이 밀려왔으나 그것을 그대로 밀어냈다.


화장장은 고도가 높았던 것 같다. 주위엔 이렇다 할 게 없었고 날씨는 사무치게 추웠다. 안개도 껴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유족 대기실을 안내받았다. 바닥이 뜨거웠던 게 기억난다. 엄마는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울었고, 이모들은 차마 엄마를 위로하지도 못한 채 그걸 멀찍이서 바라보거나 아예 밖에 나와 침통하게 앉아계셨다. 나는 그만 울라고 엄마를 달래다가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내게 그냥 엄마를 실컷 울게 두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로비 의자에 모여 앉아있던 사촌들이 나의 눈치를 봤다. 나는 농담을 했고, H오빠는 너무 빨리 괜찮아진 듯 보이는 내가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는 듯 보일 뿐,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느 하나 괜찮은 것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괜찮아 보이는 나'를 걱정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껍데기와 알맹이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그럼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알맹이는 어디로 가서 울어야 할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로비와 대기실 모니터에 아빠의 이름이 떴다. 아빠가 화장되는 차례라는 거였다. 나는 발을 질질 끄는 엄마를 부축해 하얀 벽 앞에 섰다. 하얀 연구실 같은 곳. 가마 같은 곳에서 불이 타오르고, 엄마가 소리 내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너네 아빠 뜨거워서 어떡해? 저거 뜨거워서 어떡해......"


나는 온통 멍한 채로 허무함에 대해 생각했는데, 엄마는 그 순간에도 아빠의 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례식 내내 웅웅거렸던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을 채웠다. 나 어디가 고장 나 버린 걸까. 몸과 입이 구속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에서 일하시는 분 중 한 분이 다 타지 않은 뼛더미 몇 조각을 벽 건너로 보여주셨다. 울음소리가 여러 군데에서 터졌다. 나는 백치같이 서서 가만히 '아빠였던 것'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얼마간 더 흐르고 항아리 같은 것을 건네받았다. 매우 뜨겁고 무거웠다. 아빠의 덩치가 일반 사람들을 훨씬 웃돌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아빠. 늘 나를 안아주고 업어줬던 아빠. 아빠가 수없이 나를 안아줬던 날들, 그리고 아빠의 등에 업혔던 날들을 기억한다. 퇴근하던 아빠의 품에 안기던 어린 나, 아빠와 함께 자기 위해 기다렸다가 아빠의 팔을 베고 잠들었던 평화로운 밤들, 고등학교 수업 중 쓰러진 나의 연락을 받고 달려와 나를 업고 응급실에 갔던 아빠, 늘 나의 책가방을 들어주던 아빠. 나는 언제나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 중 가장 무거운 것을 아빠에게 의탁해 살아왔는데 정작 한 번도 아빠의 무게를 덜어준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 함을 드는 것은 내 생에 최초로 아빠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두 손으로 들어 품에 끌어안았다. 그 무게와 온도가 버거워 땀이 흘렀으나 그걸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모두 함께 장지로 가는 버스에 올라서 한 손으로는 그걸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건조하고 주름이 진 손. 엄마와 아빠는 늘 내 손을 잡을 때마다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손이라고 핀잔을 주며 내 손을 아껴줬는데, 아빠와 손을 마주 잡아본 기억이 흐릿하다. 마지막 기억들 속의 나는 언제나 손을 마지못해 내줬을 뿐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아빠를 느끼면서, 시선은 창 밖에 둔 채.


도착지에 내렸다. 입구에는 조문객들이 남겨둔 쓰레기가 모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공장들이 있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아빠를 묻을 곳은 산 중턱쯤에 위치해 있었다. 도로가 편하게 나 있는 것이 아니라 험하고 언 길을 한참 올라야 했다. 엄마가 지금보다 나이가 들고 나서도 여기를 편하게 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사가 생각보다 높아 나는 몇 번이나 다리를 헛밟았다. 함을 떨어트릴 뻔하기도 했다. 


뜨거운 함을 끌어안은 몸에서는 땀이 나고, 겨울 사람은 시리고 추워 입김이 났다. 마음은 허하게 뚫려서 바람이 새는데 손 안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 나는 몇 번이나 휘청였다. 나는 발을 헛돌면서도 그것을 품에서 놓지 않으려 힘을 꽉 줬고, 결국 삼촌 중 한 분께서 나를 붙들고 같이 길을 오르셨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묘지들을 지나 마침내 도착했다. 우리는 작은 소나무를 샀는데, 발인 직후에 산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빠를 묻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도 아주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던 중 할아버지의 관을 묻을 때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비명 같은 울음을 터트렸던 것을 기억한다. 이번에는 다들 살얼음을 걷는 듯 무겁고 침통하게 침묵했다. 젊은 죽음은 속 시원한 울음이라는 틈도 남기지 않는 가혹하고 잔인한 것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우리는 막내 외삼촌의 주도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나와 엄마는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이기에 알지 못하는 노래였다. 원불교와 개신교와 가톨릭이 기묘하게 섞인 이 장례가 서로 간의 화합과 이해와 포용이 아니라 하나의 불협화음처럼 느껴졌다. 아빠를 보내는 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조차도 서로가 미묘한 불편함을 감지하고 침묵한다는 것이 기묘하고 죄스러웠다. 나는 알지 못하는 가사를 조금 느리게 따라 불렀다. 속이 허하고 추웠다.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추운데 너네 아빠 어떻게 가..."


그러게 말이야. 아빠 어떻게 가. 억울하고 원통하고 허망해서, 이 세계에 이 많은 못다 한 것들을 두고 어떻게 가려고 그래?


인부들이 아빠를 묻은 곳을 알아볼 수 있도록 흙으로 둥근 표시를 해 두었다. 엄마는 그걸 애틋하게 쓰다듬으며 울었다.


"OO아빠. 어머니는 우리가 잘 모실게. 호강시켜 드리진 못 해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게. 걱정하지 마. 알겠지..."


가슴이 영원히 뻥 뚫렸다.




발인이 끝났다. 엄마는 공인 중개사셨던 작은엄마께 부탁을 해 두어 우리 집에 며칠 묵으며 부동산 관련 문제를 같이 검토해 달라 부탁해 둔 참이었다. 유급 휴가를 쓰며 우리 집에 몇 달간 묵겠다는 작은 아빠의 의견은 거절했다. 현재 상황에서 작은 아빠가 현실적으로 도움은커녕 의사소통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며, 이미 소진된 엄마와 내가 그 성질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엄마는 할머니께 우선 집에 가 계시라 인사를 하고, 작은 아빠를 포옹하려고 했다. 작은 아빠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몸을 돌려 그 포옹을 피했다. 우리가 자신의 도움을 거절한 것도, 그러면서 전 배우자에게는 손을 내민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불길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불 같고 충동적인 작은 아빠보다 냉정하고 사려 깊은 작은엄마가 일을 처리하는데도, 우리의 심적으로도 훨씬 힘이 될 것을 알았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탔다. 누구의 차였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휴대폰을 켰는데 다 읽을 수도 없이 문자와 부재중이 쏟아졌다. 명복을 비는 문자들, 걱정하는 친구들, 마음이 많이 힘들겠지만 어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연락들... 뒷자리에서 우리 누구부터 만나야 한다고 했지?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원체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명함들을 손에 쥐고 우물거렸다. 힘겹게 기억을 더듬었다. 


무언가의 끝, 그리고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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