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업스테이트에서 보낸 새해
*1월이 가기 전 부랴부랴 올려보는 (늦은) 신년여행 일기
2025년이 밝았다. 새해를 기념해 산속으로 신년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왜인지 고요한 자연 속이라면, 작년을 돌아보고 올해를 계획하는 꽤 어려운 일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장소는 업스테이트 캣스킬의 a tiny house resort. 남편 친구들이 추천한 스몰 비즈니스 리조트다.
이 여정에 당연히 클로버도 함께했다. 영역동물인 고양이를 여기저기 낯선 곳에 데려가는 게 무리인 걸 알면서도 사료만 가득 채워 주고 어두컴컴한 집에 홀로 두는 게 마음이 쓰여서, 2박 이상 하는 국내여행에는 가능하면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처음엔 불편하고 무서운 심기를 팡팡 풍기더니, 슬금슬금 나에게 기대는 녀석. (코 쓱-) 목적지까지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는 새해라 그런지 한산했고, 비와 눈, 안개가 번갈아 내리며 1월 다운 스산한 날씨를 선보였다. 클로버를 토닥이고, 남편이 좋아하는 케이팝들을 틀어주며 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
앙상한, 그러나 단단한 겨울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가다 보니 우리가 2박 3일 지낼 집이 보인다. 두 사람이 눕기에 충분한 킹사이즈 침대와 간이침대로도 쓸 수 있는 푹신한 소파, 식탁 겸 데스크로 쓸 수 있는 테이블, 전자레인지, 오븐, 미니 스토브, 물주전자 등 필수적인 건 다 갖춘 주방, 샤워부스를 갖춘 화장실, 그리고 작은 옷장까지. 전형적인 캠핑카 스타일의 필통사이즈 만한 공간이었지만 너무 깨끗하고 말 그대로 ‘작지만 알찬’ 구성에 좀 감동했다. 게다가 4면이 다 창문이고 보이는 풍경이 나무들이라니. 고양이 동반 가능한 집이 이곳 밖에 없었는데, 다른 집들은 얼마나 더 근사할지 너무 궁금했다.
체크인이 오후 3시였던지라, 우당탕탕 짐을 풀고 차 한잔 마시고 있으니 금세 어둑해진 하루. 일부러 소셜미디어와 전화, 문자를 멀리하고 있으니 뭘 해야 할지 멍해졌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남편은 침대 위에, 나는 소파에 앉아 밖을 바라보니 그 시간 그대로도 좋았다. 들리고 보이는 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꼬마전구들의 불빛. 아침부터 차 픽업하고 운전하느라 고생한 그도 단잠에 빠져들고, 하루종일 잔뜩 긴장했던 클로버도 저녁 캔을 뚝딱 해치우곤 꾹꾹이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절로 노곤해졌다.
Day 2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캠핑장을 한 바퀴 산책했다. 농장의 염소들과 양들은 권태로운 얼굴로 볕집을 무한정 질겅이거나 바닥에 철부덕 앉아 긴긴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중 사교성 넘치는 염소 한 마리의 적극적인 환대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도 잠깐, 1월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클로버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아침의 공기가 너무 맑았던 탓인지 남편 어깨 위에 올라앉아 시원하게 쾌변을 봤다. 처음엔 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진 줄 알았건만ㅋㅋ
숙소로 돌아오니 떠나기 전날부터 느껴지던 감기기운이 심해진 걸 느꼈다. 대충 아침을 먹고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6시간을 내리 잤나보다. 눈떠보니 오후 4시. 해 지기까지 딱 30분이 남았다. 그사이 남편은 혼자서 영상도 찍고, 글도 쓰고, 클로버랑 놀아주면서 잘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워 남편.
잠으로 에너지를 회복하고 부랴부랴 근처 타운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뉴욕의 작은 소도시들은 너무 귀엽다. 영화세트장에 온 느낌의 예스러운 인테리어와 건물들은 언제 봐도 즐겁다. 로컬 아티스트들의 그림과 책, 라이프스타일 용품들을 함께 파는 커피숍에서 갓 만든 라테를 조심스럽게 마시며 둘러본다. 한쪽 벽면에 가득한 크고 작은 캣스킬 마을의 이벤트들. 서로가 서로를 아는, 뉴욕시티와 그렇게 멀지 않은, 이런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은 어떨까. 잠깐 상상을 해보았다.
커피를 들고 미리 예약해 둔 무료 아트클래스에 참여했다. 타이니 하우스가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우리가 선택한 클래스는 ‘유리병 콜라주’ 클래스. 이외에도 수채화, 타일 페인팅, 북마크 만들기 등 다양한 소규모 아트클래스를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클래스가 열리는 작은 오두막엔 타이니하우스의 주인이자 클래스를 진행해 줄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과 함께 캣스킬에 타이니하우스를 하나둘 만들게 됐단 이야기부터 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여름엔 지역 뮤지션 섭외에 공을 들인다는 이야기 등 도란도란 수다를 주고받으며 유리병을 꾸미다 보니 어느새 1시간이 훌쩍 가있었다. 오너의 얼굴을 직접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왠지 더 정이 가는 곳이었다.
오두막을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트레이더조에서 사 온 냉동 옥수수와 아스파라거스, 버섯 등 야채와 구황작물 그리고 냉동 코리안 갈비를 그릴에 올리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강한 바람에 장작불에 불 붙이기도 실패하고, 밥도 숙소 안에서 먹었지만 숯의 향을 머금은 잘 구워진 육즙 가득한 버섯과 양념 달콤 짭짤하게 잘 베인 갈비까지.. 한입 먹는 순간, 그냥 다 감사했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하랴.
DAY 3
다음날, 11시 체크아웃 전 어제 극악한 바람 때문에 못 피운 불을 피우고 ‘모닝불멍’을 했다. 간밤에 눈인지 부슬비가 내려 나무들이 젖어있어 여전히 캠프파이어 스타일의 불은 무리였지만 불길이 일어나고 사그라드는 형상과 그 열기에 1-2시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던 것 같다. 이 좋은 순간을 클로버에게도 나눠주고 싶어, 애기 보자기에 싸듯 꽁꽁 패딩으로 둘러싸 매고 같이 앉아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자미눈을 뜨고 선잠에 빠져드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또 작은 행복이 밀려왔다.
특별할 것 없이, 자연 속에서 밥 먹고 쉬고 음악 들으며 보낸 2박 3일의 시간. 모든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들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져 강제로 단순한 상황에서 지내다 보니, 깨달은 것들이 있다. 행복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 행복은 ‘지금 여기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존재들과 상황에 온전히 마음을 줄 때 더 진하게 다가온다는 것.
결국 신년 계획까진 세우진 못했다. 뭐 그래도 괜찮다. 1년에 몇 안되는 이런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마음 듬뿍 충전했으니, 계획 같은 건 이제부터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