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연수편
"겁은 많은데 깡은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B 모 브랜드의 신차시승을 함께 한, 업계 대선배의 평이었다. 겁이 많은 이유는, 자차없이 각 브랜드 신차 출시때만 잠깐 맛보는 경험 외에는 운전경력이 전무했기때문이고, 깡이 있는 이유는 운전이 얼마나 섬세한 주의를 요하는 일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첨단 기술력을 탑재한 '신형' 외제차들의 고급진 맛을 느껴보고, 휴일엔 차를 렌트해 서울 근교의 미술관으로, 한적한 카페로 훌쩍 떠날 수 있던 자유로움은 운전을 하기때문에만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물론 거의 매번, 차를 버리고 걸어오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뉴욕에 오면서 혹시 몰라 국제운전면허증을 만들어왔지만, #년동안 단한번도 사용할 일이 없었다. 뉴욕의 특수성이겠지만, 대중교통 혹은 우버만으로도 충분히 다닐만했고 뉴저지 혹은 맨해튼에서 아주 멀리 살지않는 이상 굳이 자가용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복잡한 뉴욕시티만 벗어나면 광활한 자연이 지천이었고 갈곳도 많았다. 매번 (운전천재인) 남편이 운전대를 잡았지만, 종종 홀로 자유롭게 한국 이곳저곳을 다니던 때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 마침, 시간 많던 코비드때 따둔 필기시험의 5년 유효기간이 올해라는 걸 확인하고(!) 부랴부랴 도로연수 일정을 잡았다.
1차 시도 | 뉴욕 로드 테스트의 쓴맛을 보다
4월 말, 플러싱의 유명 한인 운전학원에 등록하게 됐다. 워낙 평이 좋은 곳이라 다른 곳 알아볼 생각도 않고, 리뷰처럼 '나도 한번에 붙을 수 있겠지' 부푼 기대를 갖고 '5월 한달 내 운전면허 따기'를 목표를 삼았다. 50대? 사장님 혼자 올인원으로 모든 걸 다 하는 곳이라 스케줄 잡기가 쉽지않았지만 빨리 따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비웠다. 5월 한달동안 5번의 연수를 받았고, 1회에 90분, 보통 한적한 주택가로 가서 좌회전, 우회전, 스탑사인 등을 연습하고 3,4회차때쯤 평행주차와 유턴을 배운다. 비용은 회당 $80 (현금으로만!). 어떻게 서울에서 운전을 했나싶게 정말 까맣게 잊어버려서, 오히려 처음부터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기 좋았다. 매너가 몸에 밴 사장님이 사적인 질문 1도 없이 굉장히 친절하게 가르쳐주셔서 좋았다. 더불어 헷갈리니까 괜히 다른 운전강습 영상은 일절 보지말래서, 진짜 마음편하게 '잘되겠지' 생각하며 다녔다. 내인생 처음으로 이렇게 플러싱에 자주 온 것도 처음이었지만, 덕분에 한국책이 거의 한국도서관 급으로 많은 플러싱도서관에서 매번 원없이 한국책을 빌려볼 수 있었던 건, 너무 행복했던 기억. 종종 치즈김밥, 버섯김밥, 쫄면떡볶이 등 양손가득 포장해갈 땐 팬시한 레스토랑가서 외식한 것보다 훨씬 행복하기도... ㅎㅎ
그렇게 한달 열심히 달린 후 처음으로 도전한 로드테스트. 결과는 '술먹고 운전한' 사람마냥, 처참했다.
한국의 실기시험과 다르게, 미국은 랜덤으로 배정된 시험관이 옆자리에 타서 좌회전하세요, 우회전 하세요 지시를 내린다. 그러면서 귀신같이 뭔가 잘못하면 '평가항목'에 체크를 하고, 그렇게 합산된 점수가 30점이 넘으면 탈락. 빡센건 대부분의 항목이 10점,15점이라 2-3번 실수하면 가차없단 거다.
일단, 처음 정차된 차를 움직였을때부터 (테스트1) 망했다. 분명 뒷차가 엄청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하고 도로로 진입했는데, 시험관이 꽥 짜증을 나며 '이봐요, 뒤에 차가 오는데 이렇게 나가면 어떡해요?' 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안그래도 긴장했는데 더 긴장하고 시키는데로 우회전만 두세번 했는데, 차 세우라고 하고 5분도 안되어서 끝났다..... ^_^ 너무 황망해서 시험관이 'Have a great day'하는데 뭐라 대답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차도, 유턴도 못해본게 너무 아쉬웠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싶었는데, 6시즈음 나온 결과를 보고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첫관문에서 걸린 건 그렇다쳐도, 아니 왜이렇게 감점된 부분이 많지? 분명 제대로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표만 보면 '운전하면 안되는 사람'의 성적표라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된 순간이었다.
2차 시도 | 발전이 있으나 여전한 운전미숙 상태
2차 시험은 2주 뒤로 빠르게 잡혔다. 시험 전 두번의 연수 일정까지 추가로 잡았다. 그리고 시험 준비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특히 1차시험에서 감점당한 부분들이 왜였는지 기억을 되짚으며, 온갖 운전영상을 참고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미국인 할 것 없이 실기시험 팁부터 안전운전 101, 로드테스트 장소 모의 드라이빙까지. 원래 일이든 시험이든 뭐든 이해될때까지 집요하게 준비하는 스타일인데, 너무 간만에 하다보니 + '머리 비우고 하라는' 사장님 스타일만 전적으로 따르다보니 내 감을 잃었었다. 여러 영상을 참고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꿀팁등을 읽어내려가다보니, 대충 뉴욕 로드테스트 스타일/ 좀 오버해서 좌우안전 확인하는 제스처를 보여야된다는 것 등 여러 실전팁 뿐만 아니라 '한번에 붙는 사람이 드물다'는 아무도 얘기해주지않던 진실을 알게됐다. 이부분이 좀 웃긴게, 나도 처음 친구들에게 운전배우러 다닌다니까 아무 얘기없다가 떨어졌다고하니 그제서야 '나도 2번 떨어졌었어' '난 4번째만에 붙었어' 라고 고해성사하듯 쏟아내는 게 아닌가?! 심지어 운전학원 사장님도 '2-3번 떨어지는 건 흔하다'고 그때야(?) 영업진실을 공유해주는데.... 이때 인간은 참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한번 떨어진 상태다보니 연수받으면서 아쉬운 부분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보통 이 사장님의 90분 스케줄은 '좌우회전 및 주행 연습 90%, 주차 및 유턴 2세트'인데, 아무래도 주차 및 유턴을 더 하고싶다고해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 및 이분만의 이미 고정된 연수 코스로 내가 부족한 부분만 좀 더 유연하게 연습할 수 없는 게 항상 아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학원을 알아봐야겠다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좋게말하면) 마치 아버지가 어린딸에게 밥먹이듯 너-무 세세하게 컨트롤하는 티칭 방식, (나쁘게말하면) 스스로 실수하면서 배울 시간을 주지않는 방식 때문에 내가 제대로 하고있는지를 시험장에 가서야 확인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웃기게도 10번 가까이 연수를 받았으면서도 '좀 더 연습할 시간이 있으면 좋을텐데'란 찜찜함을 가득안고, 2번째 시험을 보게 되었다.
결과는 처음보다는 많은 발전! 하지만 여전히 운전 미숙한 상태.
이번엔 다행히도 4관문 (좌회전, 우회전, 평행주차, 유턴) 등을 모두 해보았다. 다만, 연습 중엔 단한번도 하지 않았던 주차실수를 - 정확히는, 주차해야할 앞차에 너무 가깝게 붙어서 결과적으로 살짝 기울어진 주차를 해버리고 말았다^_^ - 해서 감점 당하고, 좌회전 등 할 때 간격가늠을 제대로 못하고 너무 천천히가서 감점을 당해버렸다. 이번 시험관은 세상 칠-한 흑인 이었는데 여러모로 너무 아쉬웠던 시험. 생각해보니 이날 남편도 응원차 아침일찍 플러싱같이 가서 기다려줬는데, 누가뭐래도 떨어졌다는 확신에, 자괴감이 들었다.
3차 시도 | 끝내 이루리라 - 조수미 '챔피언'
1차때보다 내상은 적었지만, 확실히 지쳤었다. 5월 한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과정이 벌써 7월이라니. 거의 포기하고 있을때쯤, 남편이 '이왕 하기로한거 돈이 얼마가 더 들든 끝을 낼때까지 해보자. 10번 떨어져서 면허 따는 게 낫지, 2번 떨어지고 평생 무면허 '루저'로 남을거냐' 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다시 쓰면서도 저 워딩은 진짜.. 쎘다. 더불어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집근처의 다른 운전학원에서 연수를 받아보란 것. 플러싱학원과 어떤 스타일이 안맞는지 너무 잘아니까, 밑져야본전, 3번째 시험 전에 다른 학원에서 충분히 연습을 하고 가란 것이었다.
남편의 일리있는 응원에 진짜 집근처 5분거리에 있던(있는 지도 몰랐던)! 학원에 3번 연수를 등록하고, 시험 전 3일간 연습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 일단 비현실적으로 조용한 주택가가 아닌, 실제 내가 맨날 지나다니는 정신없는 4거리가 연습의 주무대였고, 강사였던 흑인 선생님도 너무 칠-하고, 약체였던 좌우회전 거리가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주어서, 이 부분 배운 후로는 거의 매번 완벽한 회전을 했다. 또 45분이란 컴팩트한 시간 내에 내가 약한 부분들 위주로 될때까지 집중연습을 해서 '손에 익는' 감각을 얻으며 마음의 안정도 얻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얻은 건 '자신감'. 아니 왜이렇게 안전불감증이 사람들이 많은건지? 곡예하듯 자전거타는 애들, 차가 오는 데도 산책하듯 도로위를 슬렁슬렁 가로지는 아저씨, 깜박이 안키고 막 회전하는 미친 차들, 갓난쟁이 헬멧도 안씌우고 전통 스케이트보드 타는 젊은 애아빠, 차안에서 대화가 안될정도로 볼륨 맥스로 노래 틀고 신호에 서있는 맞은편 차, 그리고 다 밀어버리고 가겠단 기세의 소방차와 앰뷸런스 등... 그 짧은 순간에 '뉴욕스러운' 순간들을 다 마주친 것 같다. 또 유턴 연습할 때 매너있게 차분히 기다려주면서 엄지척 해주던 트럭아저씨, 파킹 연습할 때 맞은편 차선에서 보고있다가 'you doing good' 소리치던 아저씨 등ㅋㅋㅋ 진짜 소소하게 귀여운 추억도 쌓고.
그렇게 빌드업한 자신감으로, 다시 시도한 3번째 시도의 결과는, 합격!!!!!!!
1,2차 때와 다른 장소였지만 이곳도 차가 많이 안다니는 주택가 지역이었고, 또 유난히 이날따라 더 차가 없던 럭키비키데이! 아시안 시험관이 타서, 기본적인 인포 물어보고 스무스하게 진행됐던 기억. 오후에 합격 연락받았을 때 말그대로 소리지르면서 방방 뛰어서 클로버 꼬리가 너구리만큼 부풀어올랐던건 안비밀... 그렇게, 길다면 길었던 두달여의 운전면허따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1,000 + 은 미래를 위한 투자비용이라 생각해야지 ;)
이 과정에서 느낀 건,
남들에게 쉽다고 나도 쉬우란 법은 없다. 뭐든 정직하게 110% 열심히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운전은 기술도 중요하지만, (안전운전에 대한) 자신감이 더 중요하다. 그걸 시험관은 더 기민하게 느낀다.
서비스든 상황이든 마음에 안들면, '적극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아나서야 한다.
모든 상황이 나의 선생님이다. 플러싱 사장님도, 동네 운전학원 선생님도, 각자의 스타일로 나의 운전 기본기를 다져주었다. 두번 탈락한 상황에서도 배울점이 많았다. 레몬을 레몬주스로 만드는 건 내 마음가짐에 있다는 걸 다시한번 느낀 순간.
절대 포기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