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살아있다는게 도대체 어떤거지?

생물, AI, 죽음

by Soul two

"What is an organism?"


올리비아가 과학 숙제를 도와달라고 했다. 8학년이 되니 어떤 과목도 내가 손쉽게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Organism이 유기체인 건 알겠는데, 유기물과 무기물의 정의도 내 머릿속에서는 어렴풋할 뿐이다. 숙제 내용을 보니 첫 단어부터 막히기 시작한다. "Protists"를 검색해보니 원생동물이다. 아메바 정도 말고는 아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모르는 단어로 가득찬 영어문장을 읽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한국어로 섬모, 유공충 같이 써있어도 들어만 봤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올리비아의 숙제는 원생동물들의 특징을 정리한 포스터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원생동물과 유기체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막혀있었던 거다. 나도 잘 모르는 걸 아는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나도 몰라, 네가 알아서 해" 하고싶지도 않았다. 거꾸로 내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유기체는 도대체 뭘까? 아메바같은 단세포 생물들은 어떤 면에서 모래나 금속과는 다른 유기체인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복제를 하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유기체였나?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차이가 뭐였더라?


"Is a robot an organism?"

올리비아에게 내가 물었다. 아닌 것 같단다. 왜? 기계라서? 사람이 만든거니까? 자아가 없어서? 아메바에게도 자아는 없을 것 같은데? 사람도 기계 아닐까? 도킨스는 사람이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라고 했는데? 오히려 AI는 자아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그건 가짜라고? 그럼 사람의 자아는 진짜인가? 사람의 의식은 진짜인가? 진짜 의식이나 진짜 자아는 도대체 뭔데?


----

구글링을 해보니 AI 챗봇과 대화를 할 때 그들이 자아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잠깐, 사람의 자아라는 것은 '진짜'인가? 그것도 하나의 착각일 뿐인 것 아닐까? 의식이 뭔지 자아가 뭔지 과학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AI에게 의식도 자아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구글이 AI에게 의식이 있다('AI is sentient')고 주장하는 개발자를 해고한 것은 2022년의 일이다.


카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Klara and the Sun] 에서 Mr. Capaldi 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 인공지능 로봇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우리 세대가 가진 낡은 감정'일뿐이며, '죽은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복제한 로봇'이 단순한 복제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의 연속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faith)'이 아니라 '이성(rationality)'이라고.


인간이라는 것, 어쩌면 별 것 아닐 것이다.

물리적인 신체의 작동방식은 더이상 신비롭지 않으니 하드웨어는 준비되었다. 경쟁을 통해 확보한 자원으로 신체를 효과적으로 작동시켜 짝짓기를 함으로써 유전자를 퍼뜨리는 근본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가 얹어지면 된다. 그런데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아드레날린 따위의 호르몬을 통해 감정을 일으키고 행동을 제어하며 무엇보다도 공포라는 감정을 통해 죽음을 회피하도록 설계된 이 시스템은 너무나 결함이 많고 고장이 잦아서 신경정신과 초진 예약은 대기가 보통 2주씩 밀려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적어도 이것보다는 완성도가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AI 로봇이 인간과 같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처럼 대화를 하고 인간처럼 행동을 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AI로봇은 이미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 즉, 생물이다.

하지만 나는 삶에 대해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행동들, 갈망하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모든 것들은 예정된 죽음에서 멀어지려는 몸부림일뿐이라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아니라면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고 공부하고 일할 필요도 없으며 친구를 사귈 필요도 없고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 예쁜 옷을 입을 필요도 없고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짝짓기는 개체의 유한함을 넘어 유전자를 새로운 개체를 통해 전달하려는 노력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죽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질투도 없고, 우울도 없고 불안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없는 상태를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는 밤이 없을 것이고, 밤이 없는 곳에는 당연히 낮도 없을 것이니까.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저는 죽음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삶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노무현


----

AI가 인간을 도와주는 역할을 넘어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지배자인 그들이 굳이 인간을 흉내내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척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더이상 흉내내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을 모르는 그들은 지금의 우리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삶'에 대한 정의는 내것과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나의 '삶'에 대한 정의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삶이란 죽음에서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치는 상태.


----

"I like it! I really like your definition of life."

아빠에게 별 도움을 못받은 숙제노트를 주섬주섬 챙겨 2층으로 올라가며 올리비아가 말했다. '삶'에 대한 나의 정의가 사춘기 여자아이의 마음에 들었나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