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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안가길 정말 잘 하셨어요

누군가 맞장구쳐주길 바라는 마음

by Soul two

상가주택 2층에 방 두개짜리 월세를 얻어서 3년 반을 살았다. 1층에는 미용실과 골동품 가게가 있었고, 2층은 임대주택 2세대, 3층은 건물주인이 사는 집이었다. 3층에 사는 건물주는 나이가 꽤 많으셨는데, 내가 처음 계약하고 입주할 때는 직접 도배를 하실 정도로 정정하셨던 분이 3년여 사이에 지팡이 짚고 걷는 것도 힘겨워보일 정도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신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임대차 계약을 갱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하자보수 같은 것도 건물주 대신 부동산 사장님께서 대신 처리해주시곤 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여자분이었는데 재빠르고 영악하기 보다는 너그럽고 친절한 분이어서 좋았다. 그렇다고 일처리가 느리거나 허술하지도 않아서 입주에서 계약이 끝나고 나오는 날까지 모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다. 월세계약이 끝나기 6개월 전쯤 같은 동네에 방 3개짜리를 구해서 이사를 갈까 하고 알아본 적이 있는데 그 일로 부동산 사장님을 자주 뵙다보니 지나가는 길에 음료수도 사다 드리고 서로 가족 얘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내 가족이 캐나다에 살고있다는건 전부터 알고 계셨던 사장님은 당신 자녀가 캐나다 유학을 다녀왔다며 캐나다 이민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시곤 했다.


이사를 나오고 월세보증금 입금을 확인하고 나서 인사차 부동산에 들렀다.

부동산 사무실은 내가 살던 상가주택에서 바로 길건너에 있는 상가주택에 있었는데, 부동산 사장님이 3층 주인세대에 거주하면서 남편분과 함께 1층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하는 건물주인 것 같았다. 부동산에 들어가면 큰 지도가 걸려있는 왼쪽 벽을 따라 검은색 소파가 앉아있고, 기역자로 배치된 두 개의 큰 책상 중에 안쪽은 남편 분이, 소파를 바라보는 건너편 벽쪽은 아내분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렸고, 의례적인 덕담이 오가다 캐나다 이민 얘기가 나왔다. 남편분 말씀을 들어보니 캐나다에 이민을 가려고 10년전쯤 밴쿠버 근처에 집을 사는 계약까지 하셨더란다. 처음에는 아이들 교육때문에 이민을 결심하셨었는데, 자세한 이유는 말씀 안하셨지만 계약을 취소하고 이민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계속 살기로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한동안 캐나다에서 유학생으로 학교를 다닌 것 같았고, 딸내미는 계속 캐나다에 살고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이민 가서 산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겠더라고요. 그리고, 계산해 보면 여기 집값이 더 올랐어. 그때 이민 안 가길 정말 잘 한 것 같아요." 남편분이 말씀하셨다. "맞습니다. 외국 가서 사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저야 처갓집 가족들이 거기 있으니까 캐나다에 가도 어렵지 않게 적응하고 지낼만 하지만 기댈 곳 없이 가는 분들은 정말 고생 많이 하시죠." 맞장구를 쳐드렸다. 이민이라는 것이 집값이 더 오를만한 곳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미 지난 과거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 캐나다에도 한국보다 집값이 더 오른 곳들이 많고 환율이 오른 것까지 따지면 손익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그렇겠죠, 사장님? 안 가길 잘한 거겠죠?"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아내분이 물었다.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니 잘 하신 거겠죠." 그런데 아내분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남편분과는 좀 다른 느낌이 비쳤다. 이민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때 이민을 갔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을텐데. 도전해볼 걸 그랬나? 아내분의 눈빛은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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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서 만나는 한국분들 중에 가끔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다. "여기 오니까 어때요? 캐나다 좋지 않아요? 한국이랑 많이 다르죠?" 그런 얘기를 들으면 사실 좀 난감하다. 나의 정직한 대답은 "잘 모르겠다"인데 그렇게 대답하면 대화가 뚝 끊어질 것 같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얼버무리곤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 분은 이민 온 걸 후회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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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이라는 것이 쉬운 결정일리 없다. 가족과 친구가 있고, 모든 것이 공기처럼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려면 막연히 떠나고 싶다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 캐나다가 좋아서, 또는 미국이 좋아서 이민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장강명의 소설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떠난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 싫어서" 까지는 아니어도 "한국이 싫지는 않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견디기 힘들어서" 떠난 분들이 많지 않을까. 그렇다고 인생의 갈림길이 된 선택이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찜찜함이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때 이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때 이민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결국 똑같은 질문이다. 내가 한 선택들, 그리고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은 수많은 길들. 그 길이 나를 이끌었을 인생의 다른 모습들. 지금의 내가 있는 곳과는 달랐을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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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상상을 한다. 그때 그랬다면, 그때 취업하는 대신 유학을 갔더라면, 그때 사귀던 친구와 헤어지지 않고 결혼을 했다면,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때 아이를 낳았더라면... 지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는 금방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아니야, 그때 내가 선택을 잘했지. 유학을 갔더라면 고생만 죽어라하고 돈만 날렸을지 모르고,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싸움만 하다가 이혼했을지도 모르며, 그 회사에 남았더라면 마음고생만 하다가 지금쯤 떨려나왔을 가능성이 높지. 그때 아이를 낳았으면 학원비 대느라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었을거야. 그나마 그때 내가 좋은 선택들을 해서 그나마 지금의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고 있는거겠지. 그러다 때마침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그렇지 않아요?"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 사회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눈치가 있다면 대답은 정해져있다. "그럼요! 아주 잘 하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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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사장님 부부가 만약 이민을 선택했더라면, 그래서 캐나다에서 나를 만났다면 아마도 이렇게 묻지 않으셨을까? "역시 이민 오길 잘한 것 같지 않아요? 그때 안 왔으면 어쩔뻔 했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드렸겠지. "맞습니다. 잘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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