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눈높이로 떠나는 수도권 지하 여행
서해선을 타고 한참을 가서 소사에 도착한 뒤 인천2호선을 타기 위해 부평으로 향하는 1호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자니 한 아이가 우리를 툭 치며 아는 체 했다.
"안녕, 형아"
묵묵히 있는 작은 아이를 대신해 내가 인사를 했다.
"혼자 나왔니?"
물으니 혼자 나왔다며 대답하는 형아.
3학년인데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양이다.
"너도 지하철 투어 중이니?"
"아뇨. 그냥 가는 중이에요."
무심코 대답하는 그 아이가 대견해서 대단하다는 말을 날려주고는 지하철을 탔다.
그 아이는 몇 정거장 안 지나 내렸고 우리는 부평에서 내려서 인천1호선을 거쳐 7호선으로 갈아탄 후 석남에서 인천2호선을 타게 되었다. 무인으로 운행되는 인천2호선의 맨 앞쪽에서 승무원(무인이지만 안전을 위해 승무원 1명이 탑승하고 있었다)과 한 아저씨 사이의 가운데 위치에서 앞쪽을 응시하며 무인 지하철의 매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툭툭 치며 "나도 보고 싶은데.."라는 소리가 들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낯이 익은 얼굴...
"혹시 아까 본 그 형아 아니니?"
물으니 맞다고 한다.
반가움에 "너도 지하철 투어중이구나. 어디 가는 거니?"라고 물었다.
"그냥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래? 우린 공항선 타러 갈 건데."
"저도 공항선 타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래. 같이 갈까? 하하"
그렇게 우리는 마치 외국에서 동행 만나 같이 여행하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같이 공항선까지 가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졸린지 말이 없는데, 그 형아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공항선을 타자마자 자리에 떡 하니 앉아서는 옆자리에 앉으라고 챙겨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마치 형제처럼 나란히 앉아 공항선을 타고 가는데 대화하는 사람은 그 아이와 나 뿐. 모두가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유난히 쩌렁쩌렁 울렸다.
"저, 우이-신설선 타보셨어요?"
"응. 우리 며칠 전에 탔어."
"그럼 경강선은요?"
"우리 그거 엊그제 탔었는데..하하."
"그럼, 8호선은요?"
"물론 타봤지."
"그럼, 신분당선,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도요?"
"무인으로 가는거 뭐 있는지 아세요?"
"신분당선, 우이-신설선, 인천2호선?"
"제가 뭐 안탔는지 아세요?"
"뭐 안탔는데"
"의정부경전철, 경춘선, 김포골드라인"
"어? 우리도 마찬가진데.. 하하."
초3 다운 호기심으로 아이는 우리가 안해봤을 법한 것만 골라 물었는데 다 타봤다 하니 뭔가 좀 아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재미있는 것 보여줘도 돼요?"
"뭔데?"
"(영상을 보여주며)말하는 고양이에요...재밌죠?"
"아...(난감하지만)재.. 재밌네..."
그렇게 한참을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수다를 떨다 아이는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며 김포공항에서 내렸고 드디어 지하철은 적막 속에서 덜컹거렸다.
작은 아이와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내려 6호선으로 갈아탔다.
점심도 굶은 터라 갈아타는 길에 있는 던킨도너츠에서 도너츠 하나씩 사서 입에 넣었다. 물도 챙겨오지 못해 아이는 뻑뻑한 도너츠만 입 한 가득 밀어넣고도 모처럼의 도너츠에 행복해했다. (물론 속으로는 무지 졸렸던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도너츠를 하나씩 입속에 우겨넣고 다시 지하철을 탔다. 속으로는 경의중앙선을 타면 한정거장 분량을 6호선을 타고 6정거장을 돌아가자니 답답했지만, 지하철투어니까... 라는 생각으로 속으로 답답함을 숨긴 채 아이와 6호선으로 갈아탔다.
6호선을 타자마자 얼마나 가야되냐며 계속 묻던 작은 아이.
혹시나 싶어 "졸리니?"
하고 물으니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안아줄까?"
고개를 끄덕끄덕.
그렇게 우리의 지하철투어는 아이가 잠들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작은아이의 계획이 마치 나에게 신념으로 굳어버렸는지, 6호선을 타고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를 안고 6호선에서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타는 그 머나먼 길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경의중앙선을 탔는데 이게 웬걸. 자리가 없다...!!!
속으로 "하아...8정거장도 넘는 길을 어찌 서서 가나..." 난감해하고 있자니
한 중년 아주머니와 남자분이 자리를 내어주셨다.
아마도 서 계시던 남자분이 중년 아주머니에게 자리 양보를 부탁드린 듯 했다.
웬만하면 괜찮다고 사양했을 법도 했겠지만 나는 그럴 여지가 없었다.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외치며 염치불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꺼운 겨울옷들 사이에 아이를 안고 앉아있자니 엉덩이만 반쯤 걸친 채 가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중년 아주머니는 자기도 이만한 손주 있는데 유모차를 안타고 잠들면 정말 힘들다며 공감해주셨다.
그 말에 맞장구 치며 감사하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하철에서 내려서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 환승구를 한참 걸어서 겨우겨우 역사를 나오고 나니 다리도 팔도 후덜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을버스가 와서 타려는데 계단을 올라갈 힘조차 없어서 "끄응~"소리를 내며 몇 번을 시도한 끝에야 무거운 작은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내 뒤로 서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집에 겨우 돌아와 아이를 눕히고 나니 아이는 빨딱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온다. 하악하악...
아이 눕히고 숨 좀 돌리려고 했는데, 오늘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