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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Earth Apr 29. 2022

지금은 지하철 투어중-2

아이들 눈높이로 떠나는 수도권 지하 여행

중미산 천문대가 있는 휴양림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날.

두번째 방문이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신나했다.

복층이지만 숨을 곳도 없는 작디작은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온 가족이 모여 원카드 보드게임도 즐기고, 큰 아이는 지난번 휴일이라 못 갔던 천문대에도 다녀왔다.

하지만 이곳의 단점은 체크아웃하고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

실외를 가기엔 바깥 날씨가 꽤 쌀쌀했고, 아이들은 각자 가고 싶은 곳이 달랐기에 오늘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남편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일단 큰 아이가 원하는 과천과학관에 내려줄테니 큰아이는 과학관 생태관을 가고, 나와 둘째는 대공원을 시작점으로 해서 지하철 투어를 하면 어떻겠냐는 것.

왜 내 얘기는 안들어주냐며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던(요즘 작은 아이는 눈물이 많아졌다.) 작은 아이는 대번에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즐거움을 온 몸으로 표현해주었다.


그렇게 큰 아이도 작은 아이도 만족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출발한 우리.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말썽...

점점 산길로 돌아가기에 이게 무엇인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가는 길이겠거니 했는데 30분을 넘기자 청평대교가 나온다. 헐... 이 내비언니 제대로 알려준 거 맞어? 엉?!!!


당장 이 내비언니와 이혼하라며 남편에게 시덥잖은 농담으로 남편의 싸해지려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아이들은 뒤에서 언제 도착하냐며 아우성치기를 멈추었다. 알고보니 서남쪽으로 가야하는데 동북쪽으로 길을 알려주었던 것. 지금도 왜 그 길을 알려주었는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찌되었든 1시간 길을 2시간 반이 걸려서야 과천과학관에 도착했다. 남편과 큰 아이는 과학관으로, 작은아이와 나는 대공원 4호선에서 투어 시작.

모처럼 남쪽에서 시작하는 투어라 서해선도 인천 1~2호선도 노려보기로 했다. 4호선을 타고 16정거장이나 가야 서해선을 탈 수 있는 초지역. 처음부터 장거리라 아이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중간에 언제 내리냐고 묻지 말 것!!'

6~7정거장 까지는 그럭저럭 버티더니 역 간 간격이 길어지니 지루해하는 아이를 위해 솔루토이 지리 앱을 꺼내들었다. 앱에서 요리조리 지구본을 돌려서 국기를 찍어주면 해당 나라의 문화유적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앱인데, 역시나 국기와 나라 홀릭중인 작은 아이에게 바로 먹혔다. 그렇게 지구본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문화유적들을 돌아보다 보니 어느새 초지역. 두근대는 마음으로 초지역에서 서해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자니 옆에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띄었다.

무엇인고 하니 비스듬히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무려 큰 아이 어렸을 때 저 엘리베이터를 타겠다고 북쪽 끝 북서울 꿈의 숲까지 달려가서 탔던 그 엘리베이터가 아니던가.

작은 아이는 그냥 가자는데,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작은 아이를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잡아 탔다. 다행히 안타려던 작은 아이도 막상 타니 즐거워했고, 우리는 그렇게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갔다.

서해선을 타고 한참을 가서 소사에 도착한 뒤 인천2호선을 타기 위해 부평으로 향하는 1호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자니 한 아이가 우리를 툭 치며 아는 체 했다.

"안녕, 형아" 

묵묵히 있는 작은 아이를 대신해 내가 인사를 했다.

"혼자 나왔니?"

물으니 혼자 나왔다며 대답하는 형아.

3학년인데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양이다.

"너도 지하철 투어 중이니?"

"아뇨. 그냥 가는 중이에요."

무심코 대답하는 그 아이가 대견해서 대단하다는 말을 날려주고는 지하철을 탔다.

그 아이는 몇 정거장 안 지나 내렸고 우리는 부평에서 내려서 인천1호선을 거쳐 7호선으로 갈아탄 후 석남에서 인천2호선을 타게 되었다. 무인으로 운행되는 인천2호선의 맨 앞쪽에서 승무원(무인이지만 안전을 위해 승무원 1명이 탑승하고 있었다)과 한 아저씨 사이의 가운데 위치에서 앞쪽을 응시하며 무인 지하철의 매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툭툭 치며 "나도 보고 싶은데.."라는 소리가 들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낯이 익은 얼굴...

"혹시 아까 본 그 형아 아니니?"
물으니 맞다고 한다.

반가움에 "너도 지하철 투어중이구나. 어디 가는 거니?"라고 물었다.

"그냥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래? 우린 공항선 타러 갈 건데."

"저도 공항선 타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래. 같이 갈까? 하하"



그렇게 우리는 마치 외국에서 동행 만나 같이 여행하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같이 공항선까지 가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졸린지 말이 없는데, 그 형아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공항선을 타자마자 자리에 떡 하니 앉아서는 옆자리에 앉으라고 챙겨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마치 형제처럼 나란히 앉아 공항선을 타고 가는데 대화하는 사람은 그 아이와 나 뿐. 모두가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유난히 쩌렁쩌렁 울렸다.

"저, 우이-신설선 타보셨어요?"

"응. 우리 며칠 전에 탔어."

"그럼 경강선은요?"

"우리 그거 엊그제 탔었는데..하하."

"그럼, 8호선은요?"

"물론 타봤지."

"그럼, 신분당선,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도요?"

"무인으로 가는거 뭐 있는지 아세요?"

"신분당선, 우이-신설선, 인천2호선?"

"제가 뭐 안탔는지 아세요?"

"뭐 안탔는데"

"의정부경전철, 경춘선, 김포골드라인"

"어? 우리도 마찬가진데.. 하하."



초3 다운 호기심으로 아이는 우리가 안해봤을 법한 것만 골라 물었는데 다 타봤다 하니 뭔가 좀 아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재미있는 것 보여줘도 돼요?"

"뭔데?"

"(영상을 보여주며)말하는 고양이에요...재밌죠?"

"아...(난감하지만)재.. 재밌네..."

그렇게 한참을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수다를 떨다 아이는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며 김포공항에서 내렸고 드디어 지하철은 적막 속에서 덜컹거렸다.

작은 아이와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내려 6호선으로 갈아탔다.

점심도 굶은 터라 갈아타는 길에 있는 던킨도너츠에서 도너츠 하나씩 사서 입에 넣었다. 물도 챙겨오지 못해 아이는 뻑뻑한 도너츠만 입 한 가득 밀어넣고도 모처럼의 도너츠에 행복해했다. (물론 속으로는 무지 졸렸던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도너츠를 하나씩 입속에 우겨넣고 다시 지하철을 탔다. 속으로는 경의중앙선을 타면 한정거장 분량을 6호선을 타고 6정거장을 돌아가자니 답답했지만, 지하철투어니까... 라는 생각으로 속으로 답답함을 숨긴 채 아이와 6호선으로 갈아탔다.

6호선을 타자마자 얼마나 가야되냐며 계속 묻던 작은 아이.

혹시나 싶어 "졸리니?"

하고 물으니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안아줄까?"

고개를 끄덕끄덕.

그렇게 우리의 지하철투어는 아이가 잠들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작은아이의 계획이 마치 나에게 신념으로 굳어버렸는지, 6호선을 타고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를 안고 6호선에서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타는 그 머나먼 길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경의중앙선을 탔는데 이게 웬걸. 자리가 없다...!!!

속으로 "하아...8정거장도 넘는 길을 어찌 서서 가나..." 난감해하고 있자니

한 중년 아주머니와 남자분이 자리를 내어주셨다.

아마도 서 계시던 남자분이 중년 아주머니에게 자리 양보를 부탁드린 듯 했다.

웬만하면 괜찮다고 사양했을 법도 했겠지만 나는 그럴 여지가 없었다.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외치며 염치불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꺼운 겨울옷들 사이에 아이를 안고 앉아있자니 엉덩이만 반쯤 걸친 채 가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중년 아주머니는 자기도 이만한 손주 있는데 유모차를 안타고 잠들면 정말 힘들다며 공감해주셨다. 

그 말에 맞장구 치며 감사하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하철에서 내려서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 환승구를 한참 걸어서 겨우겨우 역사를 나오고 나니 다리도 팔도 후덜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을버스가 와서 타려는데 계단을 올라갈 힘조차 없어서 "끄응~"소리를 내며 몇 번을 시도한 끝에야 무거운 작은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내 뒤로 서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집에 겨우 돌아와 아이를 눕히고 나니 아이는 빨딱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온다. 하악하악...

아이 눕히고 숨 좀 돌리려고 했는데, 오늘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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