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험 얘기만 나오면 저는 꼰대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라떼는 시전하면서 자꾸만 자꾸만 그 시절과 비교하게 되거든요.
아이의 첫 시험.
그런데요.
지난 번 글에도 언급했지만 정말 평화로웠어요.
일상생활과 정말 다른 게 하나~~~ 도 없었거든요.
아이는 당연히 긴장이 1도 없었구요.
아이에게 그래도 생애 첫 시험인데 시험 스트레스가 없냐 물으니
'글쎄. 시험에 대해 딱히 고민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라네요.
다른 건 라떼 풍경과 너무 달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격세지감과 엄마의 불안 뿐이었습니다.
시험을 하루 앞둔 주말.
아이는 평소처럼 다같이 놀러 나가고 싶어하는데, 아빠는 출근이라 에미는 큰 아이를 도서관에 떨궈놓고 왔더랬습니다.
그냥 집에 있고 싶다는 아이에게 웃으면서도 조금은 단호하게 나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죠.
딴 짓을 하던지, 책을 보던지, 도서관 밖에 있는 숲을 산책하던지 알아서 시간을 보내거라. 하지만 집은 안돼. 집에 있으면 엄마는 자꾸 네가 보이니 잔소리가 나오지 않겠니? 너의 멘탈 건강과 엄마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오늘 하루는 네가 도서관에 가는 게 효도하는 거란다. 아들아.
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못내 가기 싫은 표정인 아이를 얼른 도서관으로 밀어넣고 집으로 돌아왔더랬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 도서관으로 가서 책(교과서 말구요. 그냥 책!)을 보고 있는 아이에게 아무 말 없이 따끈한 고구마에 음료를 간식으로 넣어주고 작은 아이와 다른 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놀이터가 딸려 있고, 비치된 도서량이 많은 다른 도서관 말이죠.
그렇게 작은 아이와 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역사를 좋아하는 작은 아이에게 처음으로 6•25 관련 책을 읽어주었더니 아이가 더럭 겁이 나는가 봅니다. 진짜 있었던 이야기냐며 무섭다고 하네요. 조선시대 임진왜란 얘기는 영웅 이순신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그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신났는데, 6•25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정말 겪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듯합니다. 에미는 후회하지만... 뭐 이미 읽어줘버렸으니 어쩌나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 앞 놀이터로 나갑니다. 보통 때면 어찌저찌 놀다가 비슷한 또래를 만나 걍 놀기도 하는 작은 아이인데요. 이번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던지 다른 아이들 노는 걸 빤히 바라보네요. 부러운 건지, 놀고 싶다고 말 하고 싶은데 기회를 못 잡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미는 속으로 짠하면서도 그냥 지켜만 봅니다.
뭐, 어쩌겠어요. 그 또한 사회 생활인걸요.
큰 아이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 서둘러 큰 아이의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역시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고 있던 큰 아이.
'벌거벗은 세계사-잔혹사편'
쩝. 벌거벗은 세계사 시리즈는 웬만한 건 다 읽어본 큰 아이인데요. 유일하게 잔혹사 편만 안 빌려다주었는데(지나치게 자극적인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서요...) 반강제로 도서관에 갇혀있던 아이가 익숙한 역사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기어코그 책을 찾아 꺼내 읽은 모양입니다. 아이고....
마녀사냥 이야기, 홀로코스트 등 생각이라는 걸 해볼 수 있는 묵직한 주제는 참 좋은데요. TV프로그램도 책도 이런 이야기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면이 강조되어 구성되어 있어요. 굳이 묘사까지 안해도 될 것까지 상세히 묘사해가면서 말이죠..하아~~~
사회 시간에 홀로코스트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관련 영상은 본 듯하긴 한데요. 그래도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긴 합니다.
재미있었던 모양이죠? 아이가 그 책을 빌리겠다네요. 휴우.
기왕 빌리는 거 제가 읽을 책들도 휘리릭 몇 권 끼어 빌려옵니다. 집에 와서 내일 시험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책을 펼쳐 신나게 읽는 아이에게
뭐라 해야할지 참. 난감하네요.
시험범위에는 아이의 전문분야인 생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남들 앞에서 설명을 하라 하면 신나게 줄줄줄 읊을 수 있는 나만의 전문분야 말이죠.
아무리 수줍고 내성적이어도 내분야만큼은 남들 앞에서도 설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그런 분야.
아이에게 이번 과학 시험 범위의 절반은 자신의 그런 전문 분야였기에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긴 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즐거워보였어요. 헐.)
그...그런데 영어는 그 전문분야가 아닌 것 같은데.왜 안 하는 거지?
큰 아이는 시험기간과 관계없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데요. 얼마전부터 시험기간이라며 바둑으로 친해진 친구 하나가 도서관에 매일 오더라구요. 아이의 옆에 앉아 공부를 한 모양인데요.
즈그들끼리 종알종알하다가 나름 배틀을 했던 모양입니다.
"너, 영어 본문 다 외웠어?"
"응"
"그럼 외워봐"
큰 아이가 줄줄줄 본문을 외웁니다.(시험 공부를 입으로 한 아이라 본문은 잘 외워요. 평소 공부 방식이라 시험영어도 입으로 외우는 방법을 택한 모양이더라구요.)
본문을 다 외운 큰 아이가 친구에게도 외우라고 시킨 모양입니다. 친구는 영어 프리토킹도 가능한 친구라 역시나 줄줄 외웠겠지요? 그런데 아이 눈엔 흥! 이었나 봅니다.
"엄마, 근데 그 친구는 중간 중간 빼먹었어."
라고 저에게 고자질(?)했거든요. 헐...(그래도 아들아 너보다는 잘하....는 거 같....은데...음..)
두 아이 모습만 보면 딱 한 마디가 떠오릅니다.
초딩스럽구만.
하하..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도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갑니다. 이렇게 공부배틀로 놀(?) 수 있는 도서관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엄마 아빠는 알잖아요. 그동안 애타게 바랐던 바이기도 하고 말이죠.
아이는 툴툴인데 그걸 듣고 있는 에미는 즐거워 했답니다. 아이 어릴 적부터 하도 주변에서 아이 게임 막으면 왕따된다는 말을 들어왔던지라,
(독한 에미라 아이가 왕따가 되든 말든 일방적으로 게임을 막는거 아니냐고 오해들을.....)
게임 안 하는 아이에게 친구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공부로, 야구로 친구해주는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됩니다.(반에 핸드폰 유튜브는 보지만 게임은 안 한다는 아이들도 심심찮게 있는 듯합니다. 다행이...겠죠??)
말이 돌고돌아 삼천포로 빠졌는데요.
결론은요.
시험 치는 이틀 동안 아이는 공부 시간을 늘리지도 않았구요.
밤을 샜...다는 열정은 커녕 평소보다 1시간 이상 이른 10시에 잠이 들었답니다. 하하하....
물론, 시험 전날이라고 특별히 뭘 더 본 것 같지도 않구요.
아! 일요일엔 공부 원래 안하는데 특별히 1시간 하긴 했네요. 잘...한 거죠??? 휴우.....
단원평가같았던 중간고사가 끝났습니다.
영어 듣기 평가까지 합하면 3일의 시험이 모두 끝나고 이제 수행평가 시작이라네요.
결과가 어찌 되었냐구요?
어그로는 아니지만, 저희 큰 아이의 초3 과거에는 원래 백지였어요. 교과서 백지, 문제집 백지.
초3까지 단 한 번의 받아쓰기 공부도, 단 한 번의 수학 문제집 풀이도 해 본 적 없는 순수 백지 말이죠.
(저는요. 당연히 학교 가면 선생님들이 공부 시켜주시는 것으로 다 커버가 되는 줄 알았답니다. 하하하하...)
이런 철없는 에미 덕에 큰 아이는 5~6학년 때까지 알파벳만으로 영어시간을 보냈으니 말 다했죠. (말 못알아들어서 수행도 늘 바닥이었어요. 하핫)
그 때의 백지 시절을 늘 떠올려서인지 아이의 조그마한 성취에도 저희 부부는 물개박수를 쳐주곤 합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고, 그저 아이의 작은 성취조차 감사하기만 하거든요.
물론 아이 본인 피셜, 그 때의 백지를 메우는데 4년이나 걸렸다며 본인 나름 노력은 하긴 한 거랍니다.
사실은요.
아이의 첫 시험은 저희 부부의 예상보다 잘 봤어요.
아이 표현 대로면
"100점 만점을 목표로 했으면 실망했겠지만 난 잘 본 거야. 난 50점이 목표였거든."
이구요.
에미의 평가로는요.
예상 외의 선전이었다. 정말 잘 했다. 책육아가 효과 있었구나!
입니다.
문제를 안 읽어서 틀린 실수만 제하면 실력껏 잘 풀었구요.
과학 분야는 역시나 본인이 자신한 대로 잘 나왔네요.
중학 첫 시험에서 좌절하면 공부를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달려왔던 4년의 시간들.
그 긴 시간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 치고도 아이도 저희 부부도 꽤나 만족스러운 성취입니다.(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OMR 마킹과 상관없이 저희는 아이가 실력이 일취월장했음을 인정합니다.)
뭐랄까요. 공부 시간과 양은 많지 않았지만요.
공부의 본질과 기본 개념에 충실했던 공부 방법이 효율적으로 작동했고, 효과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이번 시험을 계기로 깨달았습니다.
아이의 공부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위험한 발상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요. 그옛날 라떼처럼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만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에미의 편견은 버리기로 했어요.
적어도 저희 큰 아이는 하루종일 앉아있을 위인도 못 되거니와, 하루종일 앉혀서 억지로 시켜서 공부를 할 아이도 아니었던 거에요.
저희 아이는요.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도 않지만요.
시험 끝났다고 하루종일 놀지도 않더라구요.
시험이 끝난 당일도 평소랑 똑같이 도서관에 가서 매일 해야 할 공부를 했다네요.
그냥 평소와 똑같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다음날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 다들 피씨방으로 달려가서 7시간씩 게임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아, 시험 끝나면 노는 거구나.'를 알았다네요. 헐.
하아.
아이의 첫 시험이 끝났습니다.
이제 시험 인생이 시작됐네요.
6년의 시험 인생 기간 동안 모쪼록 성적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초심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특히 엄마인 저, 저만 잘 하면 되는데.. 그죠??)
엄마와 아이가 욕심과 좌절로 갈등 폭발하지 않고 무난한 6년의 수험 생활을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