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목련꽃이 04

by Plum



다음날은 비가 왔다. 하루 종일 쏟아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툇마루에 앉아 여러 표정으로 비를 내리는 하늘과 처마 밑에 맺히는 빗방울만 구경했다. 그다음 날은 다행히도 날이 개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아주 쨍한 여름의 햇빛과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계절을 상기시켜주었다. 잠자리채를 들고 그의 집으로 갔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그저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포기해야 하나 싶을 때쯤 그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눈에 잠자리채를 보여주며 거미줄이 없어졌으니 다시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잠자리채를 들고 집으로 들어섰고 그를 따라 꽃들이 만발한 그의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는 잠자리채를 툇마루에 올려두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담요 덩어리를 가지고 나왔다. 심심하면 얘한테 밥이나 주러 오던가 라며 담요를 툇마루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담요에 둘러싸여 작은 생물이 숨을 쉬었다. 다람쥐였다. 다람쥐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했다. 어딘가 곤해 보이는 작은 다람쥐는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누워있었고 나는 왠지 호들갑을 떨면 안 될 것 같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근데 얘 아파요?"


"응 다리 다쳤어."


"아프겠다.. 원래 키우는 애예요?"


"아니 어제 비 때문에 다쳐서 데려왔어. 나으면 다시 보낼 거야."


그는 다람쥐가 나을 때까지만 나에게 먹이를 주는 역할을 허락했다. 신이 났다. 다람쥐에겐 미안하지만 핑계를 대고 그의 집에 매일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무던한 방학이 조금은 재밌어질 것 같았다. 진짜로 도토리를 먹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파서 못 먹고 내일 기운을 더 차리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몇 시에 오면 되냐고 물었다. 그는 아침에 올 거면 10시에 오라고 했고 오후에 올 거면 2시라고 답했다. 나는 그럼 오후에 오겠다고 말하며 다람쥐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어딜 다녀왔냐고 했고 나는 목련나무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좋은 친구가 생겼다며 웃었고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선풍기 바람을 쐬었다.



그렇게 매일 그의 집을 들락거렸다. 기운이 없던 다람쥐는 점차 회복해 도토리와 상수리를 까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의 집 툇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한참을 바라보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다람쥐가 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갈 만큼 회복이 되었고 나는 그건 다행이지만 그의 집에 들락거릴 연유가 더 이상은 없어져 가는 게 내심 서운했다. 배를 깔고 누워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물 잔 두 개를 들고 나와 하나는 내 앞에 두고 하나는 자신이 마시며 다람쥐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내려놓고는 그의 손을 타고 올라가 어깨 위에 앉아 마치 그에게 귓속말을 하듯 귓가에 맴돌다가 그의 반대쪽 어깨로 넘어갔다. 그는 간지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그때 나는 곧 보지 못할 이 모습이 정말로 아쉬워졌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으며 물을 마셨다.


" 도토리 말고 상수리 달래 "


" 다람쥐 말도 알아들어요? "


" 그냥 보면 보여 "


그는 모든 말을 당연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어깨 위의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시원한 물방울이 흩날렸다. 하늘을 보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해가 쨍쨍했다. 여우비였다. 그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나에게 갑자기 집에가라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왜요 대신 싫어요 를 외쳤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럼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곧 비가 쏟아질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방에 나의 까만 발바닥을 디뎠다. 방바닥은 미미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고 방안엔 낮은 책상 하나와 커다란 두 개의 책꽂이, 방 한편에 잘 개어진 이 불 한 채가 깔끔히 정리되어있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전화기도 없었다.



그는 책상 위에 다람쥐를 내려놓았고 다람쥐는 책상 위를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나는 책꽂이에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된 책들이었다. 마치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선시대의 소설책 같았다. 나는 봐도 되냐고 물었고 그는 나를 보더니 봐도 모를 거라고 했다. 나는 대꾸 없이 눈높이에 있는 책 하나를 뽑아 들어 펼쳐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온통 한문으로 쓰여있는 책은 내가 제아무리 공부 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덮어놓고 조금 아래에 있는 책을 꺼냈다. 여전히 한문이었다. 더 아래에 있는 책을 보았다. 드디어 한글 비슷한 것이 나왔다. 지금의 글자와는 조금 상이하지만 국어시간에 배운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새였다. 나는 천천히 더듬거리며 읽어보았다. 누군가의 일상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했다.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기면 아주 오래된 종이향이 올라왔다. 읽다 보니 어설프긴 하지만 읽어질 만했고 어느새 책에 집중해 바닥에 앉아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귓가엔 세찬 빗줄기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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