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목련꽃이 05

by Plum




그의 집에서 한참을 책을 읽다가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그는 비가 그쳤으니 할아버지가 걱정하신다며 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다시 와도 되냐고 조심히 물었다. 그는 그 책이 재밌냐고 나에게 물었고 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와 저녁을 먹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 할아버지 칠성(七星) 신이 뭐야? "


할아버지는 동치미를 떠먹으며 학교에서 그런 것도 배우냐며 물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칠성신은 삼신 같은 토속신앙 중 하나라고 삼신이 아이를 점지한다면 칠성신은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수명과 복, 덕과 제물까지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칠성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행사도 매년 했다고 했다. 나는 왜 지금은 하지 않냐고 했고 할아버지는 이제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그의 집에서 보았던 책 구절이 떠올랐다.



' 칠성이 크게 노했다 '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다람쥐가 보고 싶었고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뒤척거리다 머리맡에 목련 나뭇가지를 눈앞으로 옮겨 한참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해가 좋았고 나는 집에서 자두 한 바구니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제 나를 보고 웬일이냐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가져온 자두를 툇마루에 올려놓으며 시원한 메밀차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다람쥐를 오늘 보내야겠다고 혼잣말하듯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나는 아쉬움에 괜히 입술을 삐죽이며 다람쥐의 집을 아냐고 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두를 하나 베어 물며 지금 갈 것이냐고 물었고 그는 일어나 산을 올라갈 채비를 했다. 다람쥐를 데리고 목련나무에서도 더 올라간 산속을 걸었다.



이 마을은 목련나무집을 기점으로 더 이상 집이 있지 않아 나는 처음 올라와 보는 곳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길들 과 나무 사이로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치 자기 집을 찾아가듯 걸어 올라갔다. 열일곱의 넘치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 무렵 그는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에 섰다.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다람쥐를 손바닥으로 내리곤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이내 나에게 인사를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쑥스럽지만 다람쥐에게 정을 많이 주었으므로 다람쥐에게 다가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가 다람쥐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자 다람쥐는 그와 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올라가 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하나가 날아들어 그의 곁을 맴돌았고 곧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와 그의 곁에서 날갯짓을 하였다. 그는 다람쥐에게 지었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하나를 들자 나비 한 마리가 그의 손가락에 앉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살면서 보았던 모든 것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알았다. 그냥 다 알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를 초월한 존재였다.



" 나한테 이거 보여줘도 되는 거예요? "


그의 집으로 돌아와 내가 전날 읽었던 책을 빼내어 들며 묻자 그는 말했다. 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잖아 하고. 나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한마디로 '일기'였다. 언제 인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옛날에 쓰였던 그의 일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소년이었을 적의 시간이 쓰여 있는 것처럼 아주 오래된 시간들이 적혀있었다. 내가 그의 일기를 읽는 내내 그는 조용히 약초를 정리했고 문을 열어놓은 방안에는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였다.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에게 물었다.



" 칠성신들은 어떻게 달래야 하는데요? "


" 못 달래줘. 화가 아주 많이 났거든."


" 그럼, 그냥 둬요? "


"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네가 안다고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


또 당연한 얼굴로 당연한 이야기만 하는 그의 말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에게 말했다. 나 더 읽고 싶은데 한문을 못 읽어요. 그는 말했다. 그럼 그냥 두라고. 기운이 빠진 나는 그의 곁에서 약초의 이름들이나 한참을 물어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다시 비가 쏟아졌고 나는 다시 청색 기와집에 갇혀 버렸다. 할아버지는 위험하다며 오늘은 절대 나가지 말라고 나에게 말했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어두웠다. 칠성신이 화를 내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종일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저녁이 되었을 무렵 결국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뒤적였다. 옆방에서는 티브이 소리가 흘러나왔고 나는 방에 있는 서랍과 작은 책꽂이들을 뒤적였다. 할아버지의 집에 있는 책들은 이미 내가 두 번씩은 본 책들이었기에 더 이상은 흥미가 없었다.



이번엔 서랍들을 열었다. 키가 작은 서랍장들은 세 개가 나란히 줄을 맞춰 있었다. 첫 번째 서랍장을 열자 거울과 비녀, 장신구들이 정리되어 있는 상자가 나왔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쓰시던 것이었다. 반짝이든 장신구 몇 개를 뒤적이다가 제자리에 넣어놓고는 두 번째 서랍장을 열었다. 얇은 앨범이 하나 나왔다. 할아버지의 젊었을 적 증명사진들 몇 장과 아버지의 어린 시절 사진 몇 장,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과 엄마가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의 어릴 적 사진들이었다.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각종 문서들과 서류 같은 것들이 있었다. 왠지 내가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서류들의 가장 아래쪽에 어딘가 익숙한 책 한 권이 있었다. 그의 집에서 보았던 책들과 같게 생겼다. 나는 문서들은 전부 제자리에 놓고 책을 펼쳤다. 낮에 읽었던 글의 뒷이야기였다. 그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의 일기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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