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가 다시 시작된 일상은 꽤나 빡빡했다. 예비 고3이 진짜 고3이 되고 수능을 치고, 대학에 합격을 했다. 운전면허를 땄고 쉴 틈 없이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학년이 마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 아버지의 차를 빌려 그에게 잠시 다녀왔었다. 장거리 운전이 처음이라 이틀을 운전한 것처럼 피곤했지만 삼월에 바로 눈앞에서 본 하얀 꽃이 만발한 올곧고 커다란 목련나무의 모습은 그런 피로 따위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때가 스물한 살의 봄이었다. 산더미 같은 과제를 하고 학교를 다니고 틈틈이 자격증을 준비하며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건넜다. 짬을 내서 가족들과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가끔 친구들과 밤새워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짧았지만 연애도 했으며 그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스물네 살이 되었고 대학 졸업식이 지난 이틀 뒤 할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 내 방문을 두드리시고는 할아버지가 살아왔던 시간들을 이야기해주셨었다. 그때에도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저 이야기를 마친후에 내 침대맡에 걸어둔 목련 나뭇가지를 미소 지으며 쓰다듬으시고는 잘 간직하라고 이야기하셨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주무시다가 조용히 가셨다. 아침에 본 얼굴이 너무나도 평안해서 가족 모두 조금은 안도했다.
할아버지는 원래의 집에 산에 모셨다. 목련나무가 있는 산맥과 이어지는 작은 선산이었다. 묘소를 만든 후엔 빨개진 눈으로 목련나무를 찾아가 한가득 끌어안고 많이도 울었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스물네 살의 봄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취업을 준비하고 회사를 다니고 하루하루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중간에 이직을 한번 했고 승진도 했다. 운동을 시작했고 식물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작년엔 작은 대출을 끼고 독립도 했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 올해는 안 덥다고 해도 여름은 여름이구나 "
올해의 여름휴가는 혼자서 보내기로 했다. 부모님과도 친구들과도 시간이 맞지 않고 극성수기에 휴가지에서의 바가지요금과 인파에 시달림은 이십 대에 끝내기로 했다. 부모님에게 연락해 할아버지 집에서 혼자 며칠 지내다 온다고 했고 아버지는 간 김에 선산을 좀 돌보고 오라고 했다. 할아버지 집은 김 씨 할아버지가 아직도 가끔 들여다 봐주고 있어서 주인이 없는지 십 년이나 되었지만 주인을 잃은 티가 아주 크게 나진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방문이니 오자마자 호스를 끌어 마당 이곳저곳에 물을 뿌리고, 물걸레로 툇마루와 방을 닦고, 여기저기 먼지를 털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이 쏟아졌고 청소를 끝내고 세수를 해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가 대문 밖에서 목소리를 냈다.
" 거기 누구요 "
김 씨 할아버지였다. 안 그래도 집을 돌봐주러 오셨는데 웬 물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셨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항상 너무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했고 김 씨 할아버지는 혼자서 끼니를 어떻게 때우냐며 이따가 자신의 집에 들러 반찬과 과일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볼 때마다 예뻐진다는 칭찬도 잊지 않으시고는 내려가셨다. 나는 손과 발에 물을 끼얹어 열을 식히고 차키를 챙겨 시내로 나갔다. 간단하게 장을 보고 김 씨 할아버지 드릴 건강음료도 하나 샀다. 이제는 아들이 운영하는 도너츠가게에서 도너츠도 한 봉지 샀다. 차 안에 도너츠 향이 가득했다. 집에 오는 길에 김 씨 할아버지 댁에 잠시 들려 건강음료와 반찬을 맞바꾸고 잠시 담소를 나누고 집에 돌아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나는 자두 몇 개와 도너츠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오르막길을 걸어 목련나무에게 갔다. 여름의 푸른 목련이 그 커다랗고 아름다운 나뭇가지를 뻗어 나를 반기고 서있었다. 눈이 부셨다.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두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도너츠를 꺼내 잘게 잘라 나무 밑동에 두어 조각 놓았다.
"도너츠 오랜만이죠. 나도 오랜만이에요. 이 집 도너츠. 이건 비밀인데 이제는 아들이 만든다는데 다행히 내입에는 아들이 만든 게 아주 조금 더 맛있는 거 같아요. "
혼자 키득 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매미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바람이 청아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요. 근데 이해는 좀 해주셔야 돼요. 서울살이가 여간 녹록지가 않아요. 그래서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좀 봐줘요."
저 멀리 반대편의 산 사이로 해가 조금씩 숨었다. 잠시 하늘이 여러 색을 가졌다. 분홍색과 보라색 하늘색과 하얀색. 수채화처럼 하늘을 물들이며 지는 해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 보고 싶어요. "
그때였다. 무언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하얀 꽃잎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바라보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꽃이 피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 한두 걸음 떨어져 커다랗고 아름다운 목련나무를 바라보았다. 매미소리가 무색하게 푸르른 목련나무가 마치 봄을 알리듯 하얀 꽃송이들을 만들어 냈다. 눈물이 났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줄 알았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는 줄로만 알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픈 줄로만 알았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그의 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 청색 기와집 아이야. 건강히 안녕히 지금처럼 세월을 건너가렴. 그럼 언젠가... '
아, 나는 그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를..
하늘빛을 머금은 여러 색의 목련꽃잎이 바람을 타고 춤을 췄다. 꼭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목련 향이 온몸을 감쌌다. 향기에 취하는 것 같았다. 매미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한여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