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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m Jul 31. 2021

산산조각 난 거울을 맞춰보았다



시詩 와 부서진 조각들



 

영혼이 부서진 경험을 해버린 몇 해 전이었다. 손쓸 수도 없게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 영혼의 조각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끌어안을 수도 없어 어찌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방치하고 있었다. 조각난 영혼들을 다시 맞출 힘도 더 이상은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사실 그대로 모든 게 끝나버리길 바랬다. 어른이 된 나는 누구보다 빛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누구들 만큼은 찬란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것도 버거웠다. 저기 저 강물에서 방구석에서 자꾸만 나를 불렀다. 이제 그 숨을 그만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자꾸만 물었다. 그래도 이젠 가족 때문에 붙어있는 숨을 더 이상은 내 멋대로 끊어낼 수가 없었다. 줄초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일매일 흩어진 나의 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침대 밑에서 하나, 싱크대에서 하나, 신발장에서 하나, 가끔은 모르고 내가 밟아버려 더 잘게 부서지기도 하고 내가 다치기도 했다. 하물며 컵 하나를 깨도 며칠은 쓸고 닦고 유리조각을 조심해야 하는데 영혼이 부서졌으니 오죽했나 싶다. 이놈의 조각들을 어찌해야 하나 나는 퍼즐에도 소질이 없는데 하며 매일 산산조각이나 일그러진 거울만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티브이를 틀어놓고 잘 준비를 하던 늦은 밤이었다. 정호승 시인이 나오기에 채널을 멈추고 보고 있었다. 정호승 시인의 강연이었다. <사랑과 고통의 본질과 이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고 마침 나는 그것들에게 고통받고 있었기에 할 일을 마치고 무릎을 가만히 끌어안고 티브이를 보았다. 불도 꺼진 내 작은 방안에는 정호승 시인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강연의 내용은 신기할 정도로 그때의 나에게 필요한 말들이었다. 마치 그가 나를 위해 우리 집에 찾아와 위로 한잔을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1시간 정도의 프로그램이었고 삶과 죽음, 고통과 이해에 대해 이야기를 주로 했다.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며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얼굴은 보통 편안히 잠들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삶은 곧 고통이니 죽음이란 삶의 고통에서 해방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곧 죽음과 한 몸이 될 아버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산문집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며 모래를 먹은 진주가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보호하는 성분을 만들어 상처를 치유하고 또 치유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진주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조개는 썩어버리는 것이고 끊임없이 노력한 조개는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라고 한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진주를 만드는 조개가 되어야겠다고 또 끄덕였다.



 고통의 이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박완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남편과 아들을 한해에 잃은 선생님에게 기자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냐고 묻자 고통은 그저 견디는 것이라고 하셨단다. 시인은 이 말을 빌어 인생은 극복의 힘이 아니라 견디는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잘하는 거야”라고 내가 항상 하는 내 직업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이 생각나 웃었다. 그리고 곧 그 시가 나왔다. <산산조각>이라는 시였다. 기억 속에 까마득하게 잊혔던 시가 화면 가득 담겼고 나는 더 이상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정호승, 산산조각 中

                                     

 시인은 누구나 인생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본인도 마음속에 항상 품고 다니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저 네 구절을 읽은 나는 나의 어리석음에 통탄했다. 나는 왜 나의 조각들을 맞추려 그렇게도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이었을까, 왜 껍데기뿐인 영혼의 형상을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부서져보지 않았을 땐 그저 시였던 네 구절이 부서져보니 위로가 되었다.




 부서져 보니 알았다. 내가 어떤 모양으로 부서질 수 있는지 부서졌을 땐 어떤 모습인지 나에게 쓸모없는 조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를 괴롭혔던 조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조각들을 억지로 다시 끼워 맞추는 것을 그만두고 나를 아프게 했던 조각들을 골라내 버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맞지 않았던 그 조각의 이름들은 사람이기도 했고 감정이기도 했다.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버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조각의 숫자가 줄어 가끔씩 맞춰보기에도 훨씬 수월해졌다. 나는 어쩌면 아직도 산산조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산조각을 얻었고 그 조각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빛난다. 그 조각들로 가끔은 블록 놀이하듯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무너트리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은 부서진 조각들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자주 아프게 했던 열아홉에도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로 나를 위로했었다. 시를 읽을때 만큼은 나는 수선화가 되었다.  년이 지나 <산산조각>이라는 시로 시인은 다시 한번 나를 위로했다.  어떤 말보다 크게 깨닫고  어떤 말보다 나의 생生을 희망했다. 말과 글에는 힘이 있다는  알게   그는 어떤 스승보다 나에겐 귀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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