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소녀
모든 것들이 죽어가는 계절이었어. 푸른 나무도 빨간 꽃송이도 모두 땅속 어딘가에 뿌리를 숨기고 하얀 눈에 덮인 채 따듯한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지. 하늘에선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알리는 하얀 눈송이를 쉼 없이 쏟아부었고 마을의 어느 골목길로 빨간 망토를 두르고 낡은 앞치마를 한 소녀가 꽁꽁 얼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손을 이미 식어버린 입김으로 녹이며 걷고 있었어. 소녀는 그 자그마한 발마저 아무것도 신지 않은 채 차갑고 예쁜 눈 위를 걸었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발을 신고 걷다가 어머니의 신발이 너무 커서 그만 벗겨져버렸거든. 한 짝이 벗겨진 채로 한참을 걷고 나서야 신발이 없어진 걸 알았는데 이미 동상에 걸려 아무런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신발을 잃어버린 걸 알고 소녀는 뒤돌아 갔지만 신발이 이미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찾지 못했어. 소녀는 나머지 한 짝마저 잃어버리고 말까 봐 신발을 벗어 앞치마 주머니에 걸쳐놓듯이 넣어놓았어. 어머니의 흔적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거든.
걷다가 걷다가 지쳐버린 소녀는 골목의 뒤 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어. 사람들은 지친 소녀에게 관심이 없었고 모두들 가족들과 함께 묵은해의 마지막을 따듯하게 보내려 발걸음을 재촉했지. 소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렸어. 어머니의 신발과 성냥이 몇 갑 쥐어졌지. 성냥을 다 팔아야 집에 갈 수 있었고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을 수 있었어. 하지만 거리엔 성냥이 필요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 그래도 용기 내서 외쳐보았지.
“성냥 사세요”
얼어버린 목소리로 외쳐 봤지만 모두들 힐끔하고 쳐다보기만 할 뿐 성냥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어. 소녀는 숨마저 얼어 버릴 것 같은 느낌에 더 이상 소리치는 것도 포기한 채 빨개진 발을 손으로 그러쥐었어.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어. 소녀는 고개를 들어 소리를 쫒았지. 맞은편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어.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집안은 노랗고 빨간 벽난로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식탁 위엔 음식이 가득했지. 그것을 보자 잊고 있던 배고픔이 느껴졌고 몸은 더 추워졌어. 소녀는 만지작 거리기만 했던 성냥을 꺼내 고민하다가 켜기로 마음을 먹었어. 무서운 아버지보다 당장의 추위가 더 아팠거든
성냥 하나,
성냥이 잠시 큰 불꽃을 만들었다가 이내 다시 작아졌어. 그 순간 소녀의 파란 눈앞에 믿지 못할 환상이 펼쳐졌어. 눈앞에 벽난로가 보였고 그 앞엔 안락한 소파가 있었지, 소파 위엔 하얀 눈을 닮은 고양이가 나른한 듯 하품을 하며 혀로 앞발을 핥고 있었어. 소녀는 손을 뻗어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어. 하지만 포근하고 따듯해진 기분이었어. 성냥은 천천히 나뭇가지를 태우며 줄어들었지.
성냥 둘,
이번엔 더 커다란 불이 보였어. 숲 속 어딘가였고 커다란 장작들로 만들어 놓은 모닥불 앞에 소녀가 앉아있었어. 그곳은 마치 한여름인 듯 키가 아주 큰 나무들이 푸르름을 뽐내며 울창한 숲을 만들어 냈어, 소녀의 오른쪽엔 나무로 만든 오두막집의 굴뚝에서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모닥불 위에는 맛있는 음식이 꼬챙이에 꽂힌 채 마치 소녀가 먹기를 기다리듯 맛있게 익고 있었어. 소녀가 손을 뻗어 음식을 잡으려는 순간 또다시 환상은 사라졌어
성냥 셋,
첫 번째 성냥에서 본 하얀 고양이가 보였어, 고양이는 파란눈으로 소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마치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어. 고양이는 울창한 숲길로 우아하게 걸어갔고 소녀는 얼었던 발마저 잊어버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따라갔지, 소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하얀 눈길이 파란 숲길로 바뀌었어, 눈이 쌓인 집들이 키가 큰 나무들로 변해갔어. 소녀의 눈앞엔 여름의 숲길이 등 뒤엔 겨울의 눈길이 있었지. 그때였어, 숲길의 끝에 다다르자 고양이가 발걸음을 재촉했고 커다란 호수 앞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품 안으로 뛰어올랐어. 뒷모습뿐이었지만 소녀는 알았지. 몇 해 전 소녀의 곁을 떠난 어머니의 뒷모습이었어. 그녀의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보자 소녀는 눈엔 눈물이 차올랐지. 소리 내어 어머니를 불렀고 그녀가 뒤를 도는 순간 모든 게 사라졌어. 여름과 겨울의 사이에 있던 소녀는 다시 차가운 겨울에 남겨졌어.
소녀는 서둘러 앞치마를 뒤적여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어, 다시 성냥은 타올랐고 소녀는 꺼지지 않는 환상을 만들기 위해 남은 성냥에도 불을 전부 옮겨 붙였지, 불길이 커졌고 어머니가 눈앞에 있었어. 파란 눈이 소녀와 꼭 닮은 여전히 아름다운 어머니. 소녀는 앞치마를 벗었어 성냥불을 앞치마로 옮겨 붙여 더 커다란 불을 만들었지. 그래도 부족했어, 소녀는 빨간 망토마저 벗어내고는 더 커다란 불을 만들었어. 어머니에게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며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은 순간이었어. 소녀의 손에 그녀의 파란 드레스 자락이 잡혔고, 소녀의 눈물이 그 위로 떨어졌어. 소녀는 너무 놀라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어. 어머니는 따듯한 손을 뻗어 소녀의 뺨을 감싸 쥐며 말했어.
“ 드디어 만났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딸 “
어머니의 등 뒤로 내리던 눈들이 허공에 멈춰있었어. 차가웠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고 거리 곳곳의 들리던 종소리와 웃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지. 모든 것들이 멈췄어, 소녀와 어머니만 빼고, 어느새 소녀의 노란 머리카락은 소녀가 만들어낸 불꽃처럼 빨갛게 변해있었고, 꽁꽁 얼었던 손과 발의 온기도 되찾은 후였어. 소녀는 뱃속 어딘가가 뜨거워졌어. 방금까지 모든 것들이 죽어가던 소녀의 몸이 뜨거워져 창백했던 뺨과 입술에 혈색이 돌아 붉게 물들었어. 붉어진 입술로 소녀는 말했어
“ 어머니, 이 뜨거움마저 환상인가요?”
어머니는 아름답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어, 그리곤 대답했지
“ 네가 본 모든 환상은 우리의 미래란다. 우리는 마녀의 피를 가졌어. 네가 열세 살이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니 “
소녀가 보았던 하얀 고양이는 미래에서 자신을 구하러 온 소녀였고, 몇 해 전 아버지의 과오로 병들어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마녀의 숲에서 다시 살아나 소녀가 마녀가 될 수 있는 열세 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거야. 새로운 해가 태어났고, 소녀는 지금 막 열세 살이 되었어.
“ 우리는 죽지 않는 영혼을 가졌단다. 너는 매일 더 아름답게 피어나고 절대 시들지 않을 거야 “
소녀와 어머니는 손을 잡고 함께 숲길로 걸어갔어. 따듯한 오두막집을 향해, 영생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