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엔 책장 외에도 곳곳에 책이 살고 있다. 침대 머리맡에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가 있고 서재 책상엔 우유의 역사가 올려져 있다. 쇼파엔 양자역학 이야기가 앉아있으며 가방엔 호모 사피엔스가 외출을 준비 중이다. 책을 이렇게 방 곳곳에 두다 보니 휴대폰과 노는 시간이 줄어든다. 스마트폰과 노는 것도 재밌긴 한데, 하루동안 본 쇼츠와 유튜브 콘텐츠를 기억해 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기억에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읽은 책 내용은 꽤나 생생하게 남아있었기에 휴대폰과 좀 더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자는 참 묘한 마법을 갖고 있다. 원자라는 글자에서 신비롭고 과학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거기에 력을 붙여보자. 원자력이라는 말이 되자마자 부정적인 기운이 감돈다. 단숨에 원자력 발전소와 방사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력이라는 글자는 겨우 24비트(bit)가 적용된 아주 작은 데이터다. 모나리자 그림이 약 18,874,368 비트 정도이니 24비트가 얼마나 작은 숫자인지 체감이 될 것이다. 겨우 '력' 한글자 추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뇌에 부정적 기운이 침투할 수 있는지, 원자력 발전소를 막으려는 전 세계 움직임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책에서 체화된 지식을 얻지 못할지라도,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 뇌에 영양분을 줄 수 있다. 책에서 무언가를 얻기 때문에 좋은 게 아니라, 책 읽는 행위 자체가 몸에 좋은 것이다. 최근 북악산에 올랐다가 비석에 적힌 글을 발견했다. 곧바로 글자에 눈이 갔다. 그냥 글이 있으면 눈이 알아서 쫓아간다. 뇌가 계속 글을 찾는다. 글자를 읽을 때마다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에 속이 꽉 찬 열매가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