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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오 Dec 07. 2023

갈대에 배우다

 ‘부드럽고 연하다’는 뜻의 유연함은 제각기 다른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온몸을 가을바람에 맡긴 채 한들한들 춤을 추는 갈대는 유연함의 상징이다. 가을이 되면 슬며시 예약손님처럼 내 가슴에 찾아온다. 주로 물가나 습지에서 자란 갈대는 사람들에게 가을 낭만을 전해준다. 갈대를 한국 고전에서는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정경을 읊는 시재로 다루었다. 속이 텅 비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갈대 줄기는 다 자라 단단해지면 세필의 붓대로 변신하기도 한다.     

 ‘유연’이란 말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내 아버지께서는 우리 삼 남매에게 붓글씨와 그림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족제비 꼬리털로 손수 붓을 매셨다. 여러 날을 공들여 만든 황모 세필의 붓대가 갈대 줄기였다. 우리 삼 남매는 화선지에 곧게 세운 붓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고, 아버지는 폭포수 아래 소나무 그늘에서 낮잠 자는 호랑이, 암수 다정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학, 여의주를 물고 폭포수를 거슬러 승천하는 용을 그리고, 한시를 일필휘지로 적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연한 갈대 줄기로 만든 붓을 잡았을 때의 그 가볍고 단단함은 지금도 또렷하다.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고집부리지 않고 여유있게 몸을 흔들흔들 춤을 추다가 어김없이 제자리에 선다. 우유부단하여 줏대 없는 사람에 비유되기도 하는 갈대는 비록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지라도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거센 비바람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눈부시게 반짝일 기회를 저녁노을에게 양보하는 여유까지 있다. 결코 우유부단하지도 줏대 없지도 않다. 스스로 자리를 지키며 자연에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고, 나와 아버지의 붓이 되어 글과 그림을 남겼다.      

 지적과 책망에 쉽게 분노하고 억울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와 비교당하면 어떻게든 나의 우월함을 내보이고 싶었다. 기를 쓰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의견을 무시했다. 나만 의롭고 밝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이런 말과 행동은 함께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삶의 힘을 빼기로 한다. 온갖 비바람에 순응하며 자신을 지킨 갈대에 배운다. 근거 없는 비난의 소리에 의연한 미소로 답할 수 있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난과 역경에도 너털웃음 지어본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연함으로 인연이 닿은 사람들과 다정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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