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없는 건지, 마음이 없는 건지

by 구미


"잘 지냈어?"


오랜만에 연락이 끊긴 지 좀 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몇 년 전까지, 종종 만나 여행도 가고 파티도 하던 모임의 친구였다.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에 사뭇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어... 웬일이야. 나야 잘 있지."


"나 다음 주 주말에 내려가는데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 한 번 보게."


"아... 어떡하지? 나 약속 있는데.

봐서 시간 되면 갈게. 너희끼리 먼저 만나."


약속은 무슨. 사실 약속 따윈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나갔다.

왠지 친구들을 만날 여유도 체력도 없다고 느껴졌다.


"무슨 약속인데? 중요한 거 아니면 좀 미룰 수 없어?"

"... 음. 다시 보고 연락 줄게."


그날따라 유난히 집요히 구는 친구에게 대충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로 무마하고 전화를 끊자 이번엔 다른 친구까지 합세해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댔다.


'이것들이 갑자기 왜들 이래.'


헐렁해진 관계망 속에서 한편으로 나만 놓으면 언제 든 해체될 관계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되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와서 이러는 친구들이 조금 낯설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거워진 마음에 비례해 한층 불편해진 마음은

갑작스러운 친구의 제안 탓인지,

오랜 친구들에게 시큰둥해진 내 변덕 탓인지.




사실 친구들 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반년 사이,

나는 이따금 오는 연락들에

다음에 보자는 말로 멋쩍게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동기들에게 연락이 올 때도, 새로운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원래 시간이 지나면 다들 이런 걸까?

아님 내가 진짜 지친 건가.'


내가 선택한 것이니 어쩌겠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런 식으로 관계를 지속했다가는 몇 년 후에 정말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모순된 행동이 계속됐다.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머리가 아는 걸 몸도 함께 따라준다면 내가 지금 이 모양은 아니겠지.




난 내 마음을 앞서 언급한 모임의 일원이자 그중 유일하게 연락을 하고 지내던 친한 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


“ 내가 나쁜 건가? 걔네가 싫은 건 아닌데, 그냥 내가 여유가 없나 봐”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여유가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겠지.

보고 싶으면 어떻게든 만나잖아 너.”


"...... 그렇긴 하지."


"그냥 네가 걔네를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해서 아닐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왠지 친구들에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미안해

애써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이라 여겨왔을 뿐.


아무리 지쳤어도 보고 싶은 이에겐 왕복 8시간도 기꺼이 할애했던 과거가 기억난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날짜를 조율하고 장소를 정해

단톡방에 공지하고 있을 내가 대조되듯 함께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부터 의무감과 추억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그러니까 어느샌가 사람 자체가 아닌 관성으로 굴러가는 관계에 회의감이 든다.


관계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었나.


처음엔 모든 톱니가 맞물린 어느 우연으로,

시간이 흘러선 그를 향한 관심과 그에 걸맞은 에너지로, 그리고 그로부터 먼 미래의 오늘에선 누군가의 짙은 애정으로.


어느 우연과 행운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시간에희석돼 흘러가버리지 않도록 틈틈이 손을 담가보는 것. 관계란 그런 것이다.


'한때 친했으니까',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끊기도 뭐 하니까', '거절하면 미안하니까', '관계를 끊으면 내가 괜히 나쁜 사람 같으니까'와 같은 싱거운 핑계들은 이 세심하고도 벅찬 과정에 어울리지 않는다.



잇고 잇다
잇고 있다
잇고 잊다


어딘가에서 꽤 자주 보이던 단어 조합인데

문장처럼 그리 단순하진 않겠지만 관계 역시

결국 의식적으로 이어 가거나, 당장 이어져 있거나,

언젠가 잊혀지거나 셋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 숨겨진 묘미는

타인을 통해 어제와는 다른 나를 만나는 것.

삶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으로 인해 삶이 달라지는 것. 그런 나의 하루가 그토록 기쁜 것이겠다.


궁금해진다.

당신에겐 그런 사람이 있는지. 반대로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채울수록 공허해지는 관계는 없는지. ‘서로가 서로에게'와 같은 갸륵한 마음은 종종 찾아오기도 하지만, 언제까지나 내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살면서 그에 걸맞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다면 그건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내 마음을 아끼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물리적 여유가 없어도 기꺼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충만한 감정을 가져보는 것.

그게 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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