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슬럼프가 온다.
나는 지금 그 어디쯤에 있는 걸까.
괴롭진 않지만 더 나아지지도 않는 하루
기대되지 않는 과제 같은 미래
다가오는 이, 멀어져 가는 이
놓아버린 이, 놓쳐버린 이
질긴 하루를 보내다 보면
답도 없는 문제들이 머릿속을 마구 굴러다닌다.
누군가가 행복은 여유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꼭 맞다.
여유가 없을 땐, 반짝이던 목표는 감내해야 하는 수고가 되고, 응원하는 눈빛들은 짊어져야 하는 짐이 된다.
그렇게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돌아온 밤이 다시 나를 재웠고 또다시 애꿎은 발길질을 해대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일상이 건조하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어떤 가치도 찾지 못한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허무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일 뿐이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평탄하게 돌아가는 체계와 사람들 사이로 나만 멈춰버린 것 같았다.
‘어디든 가고 싶다. 어디든.’
답답한 환경을 벗어나고픈 욕구가 치솟았다.
그렇게 내밀리듯 친구와 함께 떠난 제주도.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여행이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알찬 여행이란 의무감에 허덕이지 않은 채로 자유시간을 누렸다. 마음껏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정처 없이 걸으며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쇼핑도 하고 저녁엔 바다가 보이는 음악바에서 그저 조용히 침묵의 대화도 나누는 그런, 시간.
그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이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 갈망, 후회, 조급함. 뭐 그런 형태도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스쳐갔다.
여행에 돌아와서 나는 무언가 고삐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마음을 비웠다. 매일 퇴근 후 회사에 남았지만 빠르게 칼퇴를 하고 침대에 누워 영화도 보고 쇼츠, 릴스까지 전부 빠짐없이 섭렵했다.
회피였을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시간 아깝다고만 생각했던 그 행위들로 나는 시간이 가는지 모르게 깔깔 웃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필요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대로 쉰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잠시 머리를 비우고 한바탕 웃어 보였다면 된 거 아닌가.
쉼이란 그저 '쉼' 자체로 그 존재의미가 충분한 걸지도.
나는 스스로를 누르고 있던 강박에서 내려왔다.
남들보다 더 많이 경험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많이 성장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과제로부터 한 발 한 발, 잠시 거리를 뒀다. 그리고 그 이면을 바라보았다. 놓아버린 것들에 대해서.
방 안에 널브러진 것들을 정리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새벽까지 수다를 떨고 멀어졌던 이들의 안부를 전하고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느슨하게 시간을 썼다.
업무적으로도, 인간관계에서도 지난 나의 태도에 대해반성하고 돌아보고... 새로운 취미도 가져보았다.
그 후 후회 없이 잘 살아보고 싶다는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그렇지만 확고한 어떤 각성이 불 때까지 그저 버겁지 않은 하루를 살아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건 대단한 변화와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려는 의지와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 몸과 마음의 중심을 찾으려는 사소한 움직임들이 결국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다시, 조금 더. 한 번만 더.
돌아간다는 건 왠지 부정적이지만
돌아온다는 건 포근하고 따뜻하다.
나아가는 법만큼 언제든 돌아오는 방법도 익혀놔야지.
머물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돼야지.
누군가의 품으로, 나의 집으로, 그리웠던 안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