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원체 머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날이 무더워지면 단발 혹은 중단발로 머리를 친다.
그리고 가을, 겨울쯤이 되면 어느새 또 머리가 자라나 있다. 흐르는 시간과 합을 맞춰 내 머리는 잘도 자란다.
가끔 뭐 이리 빨리 자라나 복에 겨운 불평도 해대지만
암튼 내 머리카락들은 시간에 걸맞게 자라나고 또 그만큼 잘려나갔으며 또 종종 볶아졌다.
"이번엔 어떻게 해줄까? “
단골 미용실 언니가 물었다.
자라난 긴 머리에 파마가 하고 싶어 졌다.
'굵게 말아주시되 또 너무 무거운 느낌은 아니고 어딘가 손질이 된 듯 안된 듯 내추럴하고 자연스럽지만 또 한편으론 부스스하지 않고 세련되게. 그러면서 사랑스러운 느낌도 나면 좋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요란한 표현력보단 사진 한 장이 더 낫겠다 싶었다. 이런 이유로 늘 원하는 스타일의 머리사진을 들고 간다.
유명한 아이돌들이나 연예인 사진은 왠지 쑥스러워
미용실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을 보여준다.
"음... 이 머리는 금방 풀려버릴 수도 있는데.
그냥 언니 맘대로 해도 될까? 믿고 맡겨봐.
너 전부터 히피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았어."
"네? 아... 음..."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아, 구미씨 진짜 히피펌 한 번 해보라니까?
너무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요. 우리 믿고 진짜 한 번만 해줘요."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던
히피펌을 해달라는 직장 동료들의 아우성이 스쳐갔다.
한편으로 조금 궁금하기도 했던 머리기도 했던 터.
‘에라, 모르겠다.’
짧은 고민 후 난 과감히 대답했다.
"네...! 해주세요...!"
2시간 후.
“어휴, 펌 너무 잘 나왔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다 한 후 바라본 거울 속엔 웬 낯선 뽀글 머리가 앉아있었다.
급격한 후회가 밀려왔다. 내 우중충한 낯빛을 느꼈는지 미용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막 해서 그렇지, 여기서 좀만 풀리면 한결 자연스러워져. “
어설픈 위로 따위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고 후다닥 도망치듯 집으로 갔다.
엄마는 내 머리가 예쁘댔다. 빠글거리는 머리 탓인지
그런 엄마와 내 모습이 동년배 같았다. 회사로 가니 동료들은 더 빠글거려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한술 더 떠 앞머리 펌을 넣는 게 히피의 완성이라며
그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날 혼내기까지 했다.
여기서 앞머리까지 뽀글댔다면 난 그냥 동네 뽀삐가 되었을 텐데. 아직 내게 히피의 세계란 너무 벅차다.
어느덧, 히피를 한지도 약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 내 머리가 그렇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 나는 또 무모한 실수를 저질렀다.
친구에게 무심코 앞머리를 맡긴 것이다. 앞머리가 길러 잘라야겠다는 지나가는 말에 친구는 당차게 말했다.
"나 진짜 잘 잘라. 내가 잘라줄게."
친구의 앞머리를 훑었다. 나쁘지 않다.
"... 그럴래?"
나보다 키가 작은 친구를 위해 매너다리까지 선보이며
문구점에서 파는 사무용 가위로 앞머리를 잘랐다.
미용실 갈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고 좋았다. 음, 사실 돈이 굳어서 좋았다.
그리고 몇 초뒤
"앗... 생각보다 너무 일자인가...ㅎㅎ"
멋쩍은 미소가 나올 타이밍이 아닐 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앞머리가 반듯하니 바가지 스타일이 된 내가 서 있다.
“야 귀여워, 귀여워.”
저 방정맞은 입을 틀어막고 시간을 더도 말고 딱 10초 전으로만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급히 후회가 들었지만, 뭐 괜찮을 것이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이 흘러줄 거고
취향이라는 게 또 바뀌기도 하는 법이니까.
이제 당분간 머리는 그냥 내버려 두련다.
진짜, 진짜,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