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잔잔한 홀로코스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by 꼭두새벽

*감독/각본: 조나단 글레이저

*원작: 마틴 에이미스 <The Zone of Interest>


평화로운 일상. 평화롭지 않은 ‘일상 밖’. 일상 밖의 사람이란 1943년 독일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이다. 그들이 ‘일상 밖’이 된 이유는 영화가 루돌프 가족을 ‘일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상이란 잔잔하고 견고하다. 따뜻한 요리가 있는 식탁, 아이를 위해 책 읽어주는 아빠,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정원이라는 점에서 잔잔하다. 총성이나 비명, 까만 연기가 집 주위를 뒤덮고 있음에도 평화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견고하다.


잔잔하고 견고한 가족의 영화. 이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쉽게 뜨거워지지 않다는 데에 있다. 보통 아우슈비츠의 영화를 상상하면 뜨겁다 못해 끓어 넘쳐 마지막에 눈물이 나기 마련인데. 영화는 물기 자체를 바싹 말린 듯하다. 분노의 크기를 키워 역사를 조명하지 않고 일정 온도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족을 보여준다. 가족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아빠, 가족을 알뜰히 꾸리는 엄마. 다소 보수적이긴 하지만 구김살이 전혀 없는 교과서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일상이란 곧 학살이다. 학살이 곧 일상이 되었을 뿐이다. 학살 속에서도 권태롭게 낚시하고 수영할 따름이다. 누군가의 비명을 하도 들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 일상. 결국 영화 말미, 한밤 중 막내딸이 목이 터져라 울어도 반응하지 않는 부모가 나온다. 평화란 사실 마취나 마비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리하여 가족은 인간성이 거세된 채 자폐적으로 소통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관통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있다. 잘 들으면 비명 더 들으면 울음 같은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영화 밖엔 이입하지 못하는 관객이 있다. 애써 거리를 두며 가해자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곳엔 보통 인간적이고 이따금 합리적인 ‘보통’의 가족이 있다. 철저히 타자화된 ‘담장 밖 사람들’의 고통을 느껴보고자 애쓴다. 영화는 담장 밖 그들의 표정을 한 씬도 보여주지 않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그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타인의 소란에 무감했던 가족과 다른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아닌 죽이는 사람의 고뇌. 정해진 시간에 몇백만 사람을 없애야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그래야 가정의 유지가 가능하고. 마구 죽인다고 능사가 아니고 보다 효율적으로 해치우는 것이 최고였던 사회. 살인이나 학살 대신 ‘청소‘란 단어를 쓰던 그런 때였는데, 어쩐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왜일까. 이웃의 강아지를 쓰다듬기도, 건물(영화에선 수용소)을 짓고 운영할 방법에 머리를 맞대기도, 규칙을 어긴 자녀에겐 질서를 알려주기도 하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게 섬뜩한 지점이다. 과거의 홀로코스트를 지금의 사회가 소화해야 하는 이유다.


헨젤과 그레텔을 죽이려고 했던 마녀는 화로 속에 갇혀 재가 되었다. 마녀는 죽이려는 시도를 했을 뿐 실행에는 실패했다. 그레텔의 기지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마녀는 불에 타 죽어야 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1943년 아우슈비츠는 어떠했는가. 그곳에 그레텔은 없었나. 영화 말미 수용소를 유물로 지키기 위해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청소란 무엇이며 청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만 ‘담장 안 그들’은 끝내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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