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돌풍>

by 꼭두새벽

*연출: 김용완

*극본: 박경수

*출연: 설경구, 김희애 외


오랜만에 재밌는 드라마를 봤다. 12부작을 내리 앉아서, 넷플릭스에 릴리즈 되자마자. 세련된 느낌을 주는 극은 아니지만 촌스럽지 않았다. tvN이 아니라 SBS에서 16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 느낌. 트렌드를 고민하지 않았고 잘하는 걸 잘 해냈다. 드라마보다 영화에서 쉽게 보던 장면이 많았다. 분할 컷이 잦았고, 줌이나 슬로우를 건 컷도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극 자체는 영화보단 드라마에 어울렸다. 빠른 호흡으로 전개됐지만 그렇다고 뒤로 갈수록 힘을 잃지도 않았다. 2시간으로 압축해도 됐을 이야기가 아닌, 12부로 볼 맛이 났던 이야기. 인물이 서롤 꺾고 꺾이는 구조가 반복되는 탓에 약간 피로해지는 순간이 있지만(한 회에 엎지락 뒤치락이 몇 번씩 반복됨. 그러나 그 구조가 엉성하지 않음) 견딜만했다. 현실 정치는 얼마나 더 심하겠나 싶은 마음이 작동했다.


드라마엔 3가지 죽음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죽는 사람이 딱 3명 나온다. 골치 아픈 인물을 그냥 죽이는 것은 쉬운 선택이다. 550분 이상의 정치극에서 인물을 죽음으로 퇴장시키지 않고 끌고 가는 게 좋았다. 캐릭터를 아끼는 창작자의 마음이 드러나기도 했고, 이야기가 촘촘하고 유기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인물 하나하나가 빛나고, 그 덕인지 대사가 쫀쫀하게 연결된다.


<돌풍> 1화는 좀 단순하고 밋밋했다. 정의로운 정치인과 부패한 정치인의 대결 구도쯤이 연상됐달까. 대통령이 시해당했다는 설정만 새로웠다. 설경구가 연기한 동호의 역할이 특히 그랬다. 사명감이 끓어 넘치는 인물이 부패한 대통령을 죽이고야 마는? 정의로움이 잔뜩 묻은 대사들은 기시감도 들었다. 그러나 그게 신선한 지점이었다. 극 전체에 여러 종류의 같은 대사가 다양한 사람에 의해서 발화되는데, 정의로운(?) 대사를 엉뚱한(?) 인물이 말한다든지, 같은 대사를 다른 시기에 여러 차례 말함으로써 다른 의미를 갖게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예상대로 흘러가는 드라마는 아니겠다 싶었다.


역사가 반복되듯 정치도 반복되니까. 구태도 반복 혁신도 반복. 지난 선거에선 그 당이었지만 이번 선거에선 이 당으로 나서는. 그렇기에 다음 선거에선 또 다른 당으로 나설 수도 있는. 이해관계에 따라 빠르게 뭉치지만 더 빠르게 흩어지기도 하는 판. 그 판에서 하는 ‘말’이란 게 결국 거기서 거기 아닐까. 하다 하다 혁신을 혁신한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혁신을 혁신한다는 말을 혁신하겠다는 말은 불가능할까. <돌풍>의 ‘말’은 그 내용보다도 형식이 재밌다. 동호(설경구)도 수진(김희애)도 제가 뱉은 말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과거의 제 말에 덜미를 잡히기도 한다. 죽도록 싫어했던 사람이 쓰던 말을 스스로 쓰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동호(설경구)와 수진(김희애)의 대결은 여러모로 볼 만하다. 어느 한쪽으로 쉽게 기울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새지 않았다. 12부를 끌고 가다 보면 후반부엔 ‘아, 이 사람이 이기겠네’ 싶은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돌풍>은 끝까지 간다. 수진(김희애)은 대학생 시절 운동권이었으나 현실과 타협하다 정경유착에 휘말린 정치인이다. 인상 깊었던 건 회차 내내 수진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반복된다는 점. 물고문당하는 씬, 노동가를 제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그 두 장면만 나온다. 다양한 사건이 아닌 동일 시점 동일 사건만 계속 반복된다. 제작비 이슈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으나(아닐 듯), 플래시백으로 똑같은 씬을 반복한다는 건 결국 우리(특히 586, 아니면 뭔가 이뤄낸 사람들)가 곱씹는 과거란 것도 박제된 어떤 한순간이라는 뜻이리라. 그래서 수진은 과거와 정반대의 모습대로 살고 있음에도 과거를 끊어내지 못한 인물이다. 여전히 과거에 갇혀있다. 반대로 특이한 건 동호(설경구)다. 동호는 과거에 빚진 게 없다.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드라마에 동호의 과거 서사는 하나도 없다. 어쩌다가 이런 정치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컷 호흡마저 빠른 탓에 동호의 행동 동기나 배경은 과감히 생략됐다(행동 동기는 딱 하나, 친구 서기태의 죽음이다). 정의 운운하던 초반부의 ‘동호’가 후반으로 갈수록 입체적 ‘동호’가 된다. 민주화도 반독재도 유효하(했)고 유의미하(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에 그러했을 뿐. 24년 당신이 민주화를 실존적 가치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반복되는 플래시백에 갇혀있다는 거다. 현재만 의미 있고 현재만 중요하다.


<박하사탕>과 <돌풍>의 설경구는 묘하게 닮았다. 돌아갈 수 없음에도(없어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설경구와 돌풍을 위해 몸을 내던지는 것이 마지막 한 방이었던 설경구. 수많은 선택으로 지금의 당신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속 설경구들이었다.


+가장 웃겼던 건 노벨평화상을 두 차례나 탄 대한민국이란 설정. 그것도 두 번 다 대통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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