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용설명서, 그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나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by 덕원

밤이 깊어지면, 가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오래된 MP3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릴 때가 있다. 전원을 켜면 액정에 희미한 불이 들어오고, 십수 년 전의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온다. 그걸 듣고 있으면 딱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그저 ‘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는 담담한 기분을 느낀다.


최근에 나는, 꼭 그런 기분으로 내 사주팔자라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대단한 행운이나 경고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인생이라는, 그다지 신형(新型)도 아니고 성능도 썩 좋지 않은 기계의 사용설명서를 아주 오랜만에 꺼내 읽어보는 느낌이랄까.


설명서에는 ‘이 기계는 습기에 약함’, ‘과열 주의’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내가 수십 년간 몸으로 겪으며 겨우 알게 된 사실들이, 거기에는 처음부터 덤덤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최신형이 되라고, 업그레이드를 하라고 말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야 한다는 건, 이제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 되었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원래 습기에 약한 기계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일종의 패배 선언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덟 글자의 사용설명서와, 아주 오래전 독일의 어떤 외로운 철학자가 쓴 책을 번갈아 읽으며, 나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어떤 진실은 가장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가장 고요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아모르 파티, 라고 했던가. 뭐, 나쁘지 않군.


니체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상당히 기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비 오는 날 흠뻑 젖은 사람에게 ‘비 맞는 걸 즐겨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들렸다. 내 인생의 구질구질한 부분들, 도망치고 싶은 기억들, 그런 것들을 대체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사랑’이라는 말의 번역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말한 사랑은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담담한 시선’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내 사주팔자에 물(水)이 넘쳐서 생각이 많고 종종 우울감에 빠진다면, 그건 내가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그냥 ‘기본 사양’인 것이다.


마치 내가 산 자동차의 연비가 원래 리터당 10km인 것처럼. 그걸 가지고 20km를 가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아모르 파티란, 어쩌면 ‘나라는 기계의 연비와 고질적인 소음을 불평하지 않고, 그냥 그걸 감안해서 운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다. 적어도 쓸데없는 자책으로 엔진을 갉아먹는 일은 줄어들 테니까.



102.png 삶의 어떤 부분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해하거나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내 안의 시끄러운 세입자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또 하나의 거창한 말을 했다. 나는 이 말을 내 안에서 아옹다옹하며 살아가는 여러 명의 ‘나’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아침에 5분만 더 자고 싶어 하는 ‘나’와, 어떻게든 일어나서 달려야 한다고 소리치는 ‘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와, 그냥 누워서 새끼 고양이 영상이나 보고 싶어 하는 ‘나’.


사주명리학의 십신(十神)이라는 개념도 꼭 그랬다. 내 안에는 규칙을 지키고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정관’이라는 FM 스타일의 직장인과, 그런 규칙 따위는 지긋지긋하다며 창문을 깨고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상관’이라는 이름의 예술가가 함께 살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이 둘 중 하나를 진짜 ‘나’라고 정하고, 다른 하나를 억압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래 봐야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한쪽을 억누르면 다른 쪽이 더 삐뚤어지는, 서툰 부모의 자식 교육 같은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냥 그들이 내 안의 시끄러운 세입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월세는 안 내지만, 내쫓을 수도 없는. 그저 그들이 너무 시끄럽게 싸우지 않도록 가끔 중재나 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의 전부다.



우리의 삶도 오래된 레코드판과 같다. 약간의 잡음이 섞여 있어야 비로소 진짜 소리가 난다.



고양이가 되려는 노력


니체가 말한 위버멘슈, 즉 초인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더 이상 개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 고양이 같은 존재가 아닐까. 고양이는 자신이 개보다 달리기가 느리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그저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내어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잘 뿐이다. 그것이 고양이의 완전함이다.


우리 역시 우리만의 햇볕 드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사주팔자라는 사용설명서는 바로 그 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제법 괜찮은 지도다. 나무(木)의 기운이 강한 사람은 위로 뻗어 나갈 때, 쇠(金)의 기운이 강한 사람은 무언가를 단단하게 벼려낼 때 가장 그다운 모습이 된다.


결국 위대한 삶이란, 남들이 박수쳐주는 일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삼류 같아 보이는 부분까지 끌어안고 그럭저럭 괜찮은 ‘나만의 일류’가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104.png 완벽해지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진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사용설명서를 들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평생에 걸쳐 그 설명서를 읽고, 오역하고, 마침내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조금은 서툴고 외로운 독서 시간일 것이다.


혹시 괜찮다면, 당신의 사용설명서에서 가장 굵은 글씨로 적힌 문장은 무엇인지 들려줄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은, 그 문장을 이제 조금은 좋아하게 되었는지. 이곳에 당신의 이야기를 남겨준다면, 늦은 밤 혼자 커피를 내리는 누군가에게 작은 아모르 파티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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