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강쇠와 옹녀, 그 오래된 ‘화(火)’와 ‘수(水)’의 망명기
이번에는 판소리계 고전 소설인 <변강쇠전>의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의 삶을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를 거울에 비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인문명리의 시선으로 풀어가 봅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봅시다. ‘변강쇠’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대개는 근육질의 등짝이나 요란한 잠자리, 혹은 정력에 좋다는 장어 꼬리 같은 걸 떠올리시겠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남의 아랫도리 사정에 참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 양반들, 강쇠와 옹녀의 팔자(八字)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거 참, 야설이 아니라 처절한 ‘인간 극장’이 따로 없거든요.
그들은 색(色)을 밝힌 게 아닙니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정해놓은 규격, 그 꽉 막힌 ‘관(官)’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온 두 개의 돌멩이가 서로 부딪쳐 낸 스파크였을 뿐이죠.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선택적 주의(Selective Attention)’라고 합니디. 세상은 그들의 성적인 면만 보려 했지만, 정작 그들이 원한 건 차가운 세상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한 서로의 체온, 그 처절한 ‘생존 본능’ 아니었을까요?
옹녀를 봅시다. 서방을 셋이나, 아니 줄줄이 저세상으로 보냈다고 ‘상부살(喪夫煞)’이 끼었다며 손가락질받던 여자. 명리학적으로 뜯어보면 그녀는 아마도 임수(壬水) 일간(日干)이었을 겁니다. 그것도 제방 하나 없이 거침없이 흐르는 큰 물.
이런 사주는 주변의 웬만한 흙(土: 남편/관성)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흙이 물을 막으려다 휩쓸려 떠내려가는 형국이죠(수다토류, 水多土流). 남편들이 죽어나간 건 옹녀가 기가 세서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그 거대한 ‘바다’ 같은 에너지를 감당할 그릇들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에겐 백호살(白虎殺)이 중중했을 겁니다. 피를 본다는 흉한 기운을 의미하지만, 뒤집어 보면 남들 다 죽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압도적인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현대 심리학으로 보면 그녀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법도 한데, 오히려 짐 싸 들고 길을 떠납니다. “그래, 내 팔자가 드세다면 더 센 놈을 만나러 가겠다.” 이거 얼마나 쿨합니까? 요즘 말로 하면 자존감 만렙에,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주체적 여성 서사’의 원조 격이죠. 그녀는 재수 없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거대한 그릇을 채워줄 ‘진짜’를 찾아 떠난 순례자였던 겁니다.
그럼 변강쇠는 어떤 놈입니까? 이 친구, 사지 멀쩡한데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립니다.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욕하지만, 명리적으로 보면 그는 비견(比肩)과 겁재(劫財)가 터져 나가는 사주입니다. 비겁이 태왕하다는 건, 남의 밑에서 명령 듣고는 못 산다는 뜻입니다. 소작농이나 머슴(관성에 종속된 삶)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자아비대증 환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이죠.
그가 장승을 뽑아 땔감으로 썼다는 대목, 이거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장승이 뭡니까. 마을의 수호신이자, 공동체의 규율, 즉 ‘사회적 합의’입니다. 그걸 뽑아서 아궁이에 쳐 넣었다는 건,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도덕이니 법이니 하는 꼰대 같은 시스템, 나한테는 땔감일 뿐이야”라는 강력한 펑크(Punk) 정신의 발로입니다.
현대로 치면 그는 정규직 거부하고 배달 알바 뛰면서 하루 벌어 하루 즐기는 ‘프리터족’이거나, 사회적 성공 따위 개나 줘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자연인’입니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는(아마도 병화 丙火나 무토 戊土 였을 겁니다) 밭을 가는 데 쓰이기엔 너무 뜨거웠던 거죠.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 그냥 시대를 잘못 타고난 ‘야생마’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둘의 만남은 명리학의 핵심이론인 ‘억부론(抑扶論)’의 완벽한 예시입니다. 너무 강해서 부러질 것 같은 놈(강쇠)과, 너무 넘쳐서 흘러버릴 것 같은 년(옹녀)이 만났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들을 ‘비정상’이라 불렀지만, 그들끼리는 서로가 유일한 ‘정상’이었습니다. 강쇠의 불 같은 조열(燥熱)함을 옹녀의 차가운 물이 식혀주고, 옹녀의 정처 없는 부유(浮遊)를 강쇠의 무식한 뚝심이 잡아주었으니까요.
사람들은 그들의 밤일이 대단했다고 수군대지만, 심리학적으로 그건 ‘애착 손상(Attachment Injury)’을 가진 두 영혼이 서로를 핥아주는 치유의 의식이었을 겁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배척당한 ‘역마살(驛馬煞)’ 낀 두 인생이, 유일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곳은 서로의 품속뿐이었을 테니까요.
“남들은 다 욕해도, 너만은 나를 감당한다.”
이거야말로 현대인들이 결혼정보회사에서 스펙 맞춰가며 그토록 찾고 싶어 하는 ‘영혼의 단짝’ 아닙니까? 조건 보고 결혼했다가 3년도 못 가서 이혼 도장 찍는 요즘 세태보다, 장승 동티 나서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킨 이들의 사랑이 훨씬 더 숭고해 보이는 건 왜일까요.
2025년을 사는 우리는 다들 멀쩡한 척하며 삽니다. 양복 입고, 사원증 걸고, 지하철 타고 출근하면서, 장사하면서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옹녀처럼 외롭고, 강쇠처럼 다 때려치우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내 안의 ‘살(煞)’을 억누르느라 병이 든 건지도 모릅니다. 튀면 죽는 사회, 남들만큼만 살아야 하는 이 ‘관(官)의 감옥’ 속에서 말이죠. 변강쇠와 옹녀를 비웃지 마십시오. 그들은 적어도 자기 욕망에 솔직했고, 자기 운명에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생각합니다. 이 답답한 세상, 나를 옥죄는 장승 하나쯤 시원하게 뽑아서 군고구마나 구워 먹는 상상을. 그리고 스펙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내 뒤틀린 성격과 결핍을 있는 그대로 꽉 껴안아 줄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그러니 오늘 밤엔 좀 삐딱해져 봅시다. 남의 시선이라는 낡은 텍스트를 찢어버리고, 내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저 뻔뻔한 두 사람처럼 뜨겁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밋밋한 맹물보다는 톡 쏘는 막걸리처럼 사는 게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생각으로만 그치리라는 건 굳이 용한 점쟁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예측 가능하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