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한' 점쟁이를 찾아나설 불안한 영혼들을 위한 경고

2026년을 앞두고, 불안을 매매하는 이들에게 고함

by 덕원

2026년의 태양이 지평선 너머에서 아직 창백한 숨을 고르고 있는 이 시점, 거리는 다시금 기묘한 활기로 들썩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흉터 같은 불안을 안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나설 마음의 줄을 선다. 나는 그 행렬을 마치 사회학적 표본을 관찰하듯 건조하게 바라본다. 그들의 표정에는 다가올 시간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를 단 한 마디로 제압해주길 바라는 뜨거운 갈망이 뒤섞여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가 1960년대 프랑스 사회의 계급과 욕망을 납작한 문체로 기록했듯, 지금 한국 사회의 풍경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입시, 취업, 결혼, 혹은 막연한 대박의 꿈. 이 납작하고도 절실한 욕망들이 향하는 곳은 결국 '용한 곳'이라는 좌표다. 하지만 인문명리학술가의 시선으로 묻고 싶다. 도대체 '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용(龍)'의 환상과 언어의 트릭


'용하다'라는 형용사의 어원은 흥미롭다. 사전적으로는 '재주가 뛰어나고 신통하다'는 뜻이지만, 민속학적 무의식 속에서 이 단어는 상상의 동물 '용(龍)'과 맞닿아 있다. 용은 조화를 부리고 비를 내리게 하는 초월적 존재다. 즉, 우리가 점쟁이에게 "용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인간이 아닌 초월적 권능을 가진 존재로 격상시킨다.


그러나 냉정하게 해부해보자. 그 '용함'의 실체는 대부분 '콜드 리딩(Cold Reading)'이라는 심리적 기술이거나, 통계적 우연의 일치, 혹은 내담자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착시일 뿐이다. 에르노의 차가운 시선으로 보자면, 이것은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치환하려는 감정의 매매 계약"에 불과하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뱉어내지 못해 몸부림치듯, 현대인들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읽어낼 언어를 상실했다. 그래서 타인의 입, 그것도 신령스럽게 포장된 타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운명을 확인받으려 한다. '용한 점쟁이'는 실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불안이 투사된 거울일 뿐이다. 점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용하다는 단어가 파놓은 함정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던져진 동전 몇 닢에 삶의 무게를 위탁하는, 얄팍하고도 서늘한 믿음."



2. 명리(命理)는 점(占)이 아니다


가장 통탄스러운 지점은 이러한 미신적 행위 속에 '명리학'이라는 학문이 도매금으로 묶여 매도된다는 사실이다. 2026년을 앞두고 철학관을 찾는 많은 이들이 명리학을 그저 '고급스러운 점치기' 정도로 오해한다.


분명히 해두자. 명리학은 점(Divination)이 아니다. 점(占)이란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나 미지의 현상을, 초월적 힘이 개입된 '우연적 징표(Omen)'의 해석을 통해 인과적으로 설명하고 심리적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주술적·기호학적 체계."이다. 반면, 명리학은 태어난 연월일시의 천체 기운을 부호화하여 분석하는 '기후학'이자 '통계학'이며, 나아가 삶의 이치를 탐구하는 '인문학'이다.


용하다는 점쟁이가 "너 내년에 교통사고 나, 부적 써"라고 말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명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공포 마케팅이다. 진정한 명리학자는 "내년에는 뜨거운 화(火)의 기운이 강해지니, 당신의 차가운 금(金) 기운과 충돌할 수 있다. 그러니 매사 계획한 목표를 위한 속도를 줄이고 돌다리도 두들기듯 하라"고 조언한다.


전자가 운명을 고정된 비극으로 규정하고 복종을 강요한다면, 후자는 운명의 흐름(Flow)을 읽어주고 주체적인 대응을 주문한다. 점은 당신을 무력하게 만들지만, 명리학은 당신을 깨어있게 한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은 천문학자와 점성술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지적 태만이다.




442.png "이성의 서가(書架)와 주술의 제단,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세계의 오래된 오해."



3. 믿음이라는 이름의 어리석음


한강의 문장처럼, 우리의 삶은 때로 "날카로운 유리에 베인 듯 애리고, 하얀 눈밭에 맨발로 선 듯 시리다." 이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서 우리는 누군가가 "이쪽으로 가라"고 지시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비록 근거 없는 헛소리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2026년이라는 시간은 외부의 누군가가 점지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맞이해야 할 물리적 실체다. '용한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행위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배의 운전대를 눈먼 타인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


명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소위 '용하다'는 것은 점쟁이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운(運)이 맞아떨어진 타이밍일 뿐이다. 운이 좋을 때는 돌팔이 의사를 만나도 병이 낫고, 운이 나쁠 때는 명의를 만나도 고생하는 법이다. 점쟁이가 용해서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들을 준비가 되었거나 혹은 속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443.png "우리가 '용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결국 내면의 공포가 투사된 기괴한 허상이다."



4. 2026년, 스스로의 예언자가 되라


우리는 이제 '점(占)'의 주술에서 깨어나 '명리(命理)'의 이성으로 돌아와야 한다. 2026년 병오(丙午)년, 붉은 말의 해가 다가온다. 뜨거운 불의 기운이 천지를 뒤덮을 것이다. 이 에너지를 어떻게 쓸 것인가?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내가 부자가 되겠습니까?"라고 묻지 마라. 대신 스스로에게 물어라. "이 뜨거운 열정을 감당할 만큼 나의 이성은 차갑게 준비되었는가?"


자신의 사주팔자를 안다는 것은 정해진 미래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도구(사주팔자라는 기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다. 망치를 든 자는 못을 찾아야 하고, 붓을 든 자는 종이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인문명리학이다.


용한 점쟁이는 없다. 오직 절박한 당신과, 그 절박함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적 점술 시스템이 있을 뿐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타인의 입에 당신의 운명을 걸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의 고통과 불안을 직시하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 뚜벅뚜벅 걸어가는 당신의 두 발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용한' 예언자다.


그것이 명리학이, 그리고 인문학이 당신에게 건네는 가장 서늘하고도 뜨거운 위로가 담긴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