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 & 엘로이즈, 혹은 거세된 언어들의 무덤
파리의 공기는 차가웠고, 논리는 칼날 같았습니다.
12세기, 피에르 아벨라르는 그 칼날을 쥔 사내였죠. 스물둘의 나이에 스승을 논쟁으로 베어버리고 자신의 학파를 세운 남자. 그의 머릿속에서 신학은 명료한 건축물처럼 솟아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견고한 이성의 성벽 아래, 억눌린 짐승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명리학은 이것을 '인성(印星)과 식상(食傷)의 괴리'라고 부릅니다. 인성(학문/이성)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격국(格局, Social Structure) 아래, 해소되지 못한 식상(본능/표현)의 억부(抑扶, Inner Need)가 마그마처럼 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그마가 터져 나올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 탈출구의 이름이 바로 17세의 소녀, 엘로이즈였습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숙부 퓔베르에게 접근해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냅니다. 그는 훗날 고백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선 집을 하나로 하고 마음을 하나로 했다."
이 문장은 섬뜩합니다. 인지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전형적인 '동기화된 추론(Motivated Reasoning)'입니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교육'이라는 숭고한 명분으로 포장하여, 죄책감을 소거하는 기만술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정인격, 正印格)를 이용해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욕망이었지요. 책은 펴져 있었으나 읽히지 않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침묵 대신 거친 숨소리가 채워졌습니다. 아벨라르에게 엘로이즈는 사랑의 대상이기 이전에, 자신의 비대해진 자아(Ego)를 투영하고 확인받을 수 있는 '살아있는 거울'이었습니다.
이때 엘로이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이미 천재였습니다. 아벨라르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의 모순까지 사랑해버린 여자.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음에도, 아벨라르라는 거대한 불길(Fire)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명리적으로 그녀는 '상관견관(傷官見官)'의 운명을 자처했습니다. 기존의 질서(관)를 깨뜨리고(상관), 파멸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임신, 도피, 그리고 비밀 결혼.
격분한 숙부 퓔베르는 하인을 매수해 아벨라르의 침소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남성을 상징하는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버립니다.
그 밤, 파리의 돌바닥 위로 붉은 피가 적셔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 기관의 상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벨라르라는 인간을 지탱하던 '식상(본능적 생명력)'의 완전한 제거였습니다. 거세당한 남자는 수치심이라는 감옥에 갇혔고, 그는 스스로 수도원이라는 더 깊은 굴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그 순간 아벨라르의 영혼은 하얗게 표백되었습니다. 고통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육체를 버립니다. 아니, 육체가 그를 버렸기에, 그는 남은 생을 '순수한 이성(Pure Reason)'의 세계로 도피시켰습니. 이제 그에게 사랑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잘려 나간 살점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장 잔인한 비극은 그 이후에 시작되었지요.
아벨라르 53세, 엘로이즈 31세. 우연히 아벨라르의 고백록을 본 엘로이즈가 편지를 보냅니다. 수도원에 갇힌 지 십수 년, 그녀는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그녀의 편지는 억눌린 관능과 그리움, 신을 원망하는 처절한 기도로 젖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신에게 바쳤다고 하지만,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이곳에 묻혔습니다."
그녀의 편지는 '살아있는 자의 피'였습니다. 그러나 답장으로 돌아온 아벨라르의 편지는 '죽은 자의 돌'이었습니다. 그는 냉정했습니다. 그녀의 정열을 꾸짖고, 수도원 생활의 규칙을 설교했으며, 신학적 문답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인지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아벨라르의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입니다. 그는 거세된 트라우마를 직면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잃어버린 남성성과 치욕이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신의 종'으로 합리화했습니다. 그는 엘로이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자격'과 '기관'을 상실했기에, 그 사랑을 신학이라는 차가운 갑옷 속에 유폐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명리학에서 말하는 '격국(格局)과 억부(抑扶)의 충돌'이 빚어낸 기형적인 풍경입니다.
아벨라르는 억부(개인의 행복)가 파괴되자, 격국(종교적 권위)을 강화하여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반면 엘로이즈는 격국(수녀라는 신분) 속에 갇혀 있었으나, 그녀의 억부(사랑받고 싶은 본능)는 여전히 펄떡거리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피와 차가운 돌. 두 존재는 편지라는 종이 위에서 만났으나, 결코 섞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중세의 연인들에게서 현대의 서늘한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멘토'와 '멘티', '교수'와 '제자', '지식인'과 '추종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관계들을 떠올려봅시다.
아벨라르의 사랑 방식은 현대적 관점에서 '지적 그루밍(Intellectual Grooming)' 혹은 '가스라이팅'과 유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지식과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심리적으로 종속시켰습니다. 그리고 파국이 닥치자, 그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거창한 명분 뒤로 숨어 피해자(엘로이즈)의 감정을 "저급한 정욕"이라며 타자화했습니다.
엘로이즈가 평생 수녀원에 갇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에 의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했습니다. 아벨라르에게 그녀는 구원해야 할 '양'이었을지 모르나, 엘로이즈에게 아벨라르는 자신을 가두고 열쇠를 삼켜버린 잔혹한 간수였습니다.
명리학은 묻습니다. "균형 잃은 인성(지식)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가슴(식상)이 없는 머리(인성)는 칼입니다. 아벨라르는 그 칼로 스승을 베었고, 연인을 베었고, 마침내 자신까지 베어버렸습니다.
두 사람은 죽어서야 합장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들을 '영원한 연인'이라 칭송했지만 엘로이즈가 진정 원했던 것은, 차가운 묘비명 속의 영원이 아닙니다. 따뜻한 아벨라르의 손길이 닿았던 단 하루의 '현재'가 아니었을까요.
육체가 부서진 자리에서 피어난 신학은 숭고할지 모르나, 인간의 온기는 없습니다.
사랑은 논리가 아니라, 만져지는 살갗입니다. 아벨라르가 끝내 외면했던, 그리고 엘로이즈가 죽는 날까지 기도했던 그 진실 말입니다.
** 도식(倒食)은 강제된 욕망의 제거를 상징합니다.
"지성은 답을 찾으려 하지만, 사랑은 그저 견디는 것이다.
육체가 부서진 그 자리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