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 & 이졸데, 억압된 본능의 회귀와 육합(六合)의 역설
미약(媚藥)은 핑계입니다. 그것은 중세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죄책감 없이 탈옥하기 위해 고안된, 액체로 된 면죄부였습니다.
유럽의 왕들에게는 후궁이 없었습니다. 중세 기독교는 사막에서 태어난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종교였습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먼저 넘어갔다는 원죄론은 여성성과 성적 욕망을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리비도(Libido)는 억누를수록 틈을 찾아 솟구칩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억압된 것의 회귀'라 불렀지요. 억압이 강할수록, 터져 나오는 욕망은 치명적입니다. 그 뒤틀린 욕망의 결정체가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입니다.
여기, 바다 위를 떠도는 두 남녀가 있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들은 왜 하필 배 위에서 사랑에 빠졌는가. 명리학의 물상론(物象論)으로 볼 때, 바다는 '임수(壬水)'의 영역입니다. 제방 없는 큰 물, 흐르고 섞이며 음란함과 지혜가 공존하는 밤의 세계입니다. 그 흔들리는 물 위에서 그들은 실수로 미약을 마십니다.
이 미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Id, 원초아)'의 폭발입니다. 도덕과 규범이라는 '초자아(Super-Ego)'를 마비시키고, 오직 쾌락 원칙만을 따르게 만드는 화학적 트리거. 전설은 이들에게 '마법'이라는 알리바이를 줌으로써, 숙모와 조카 사이의 패륜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포장지를 뜯어내면 거기엔 날 선 본능만이 비릿하게 남습니다.
결혼 첫날밤, 이졸데는 시녀를 대신 침실에 밀어 넣습니다. 이것은 기만이죠.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숲으로 도망칩니다. 그들은 문명 밖으로 추방되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곳에서만 자유로웠습니. 그러나 그 자유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크 왕이 숲속에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들 사이에는 트리스탄의 검(Sword)이 놓여 있었습니다. 서로 닿지 않겠다는 최후의 이성. 이 검은 명리학에서 '편관(偏官)'입니다. 나를 억제하고, 베어내고, 통제하는 서늘한 금(金)의 기운.
이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왕은 검을 보고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육체적 접촉이 없다는 증거(검)를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원진살(怨嗔殺)'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원진은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고, 곁에 있으면 숨 막히고 떨어지면 보고 싶은' 신경증적 애증입니다.
사회적 금기(마크 왕) 때문에 그들의 합(合)은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가질 수 없기에 집착하고, 그 집착 때문에 서로의 현실을 파괴하는 관계. 그것이 원진의 실체죠. 숲속의 검은 두 사람의 육체는 갈라놓았을지언정, 엉겨 붙은 욕망의 실타래는 결코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이졸데는 왕에게 돌아가고, 트리스탄은 브르타뉴로 쫓겨나 '흰 손의 이졸데'와 결혼합니다. 이름만 같을 뿐,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여기서 융(Jung)의 분석심리학이 필요합니다.
트리스탄에게 금발의 이졸데는 그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 '아니마(Anima)'의 투사체였습니다. 반면 현실의 아내인 흰 손의 이졸데는 그가 감당해야 할 무거운 현실이자, 외면하고 싶은 '그림자(Shadow)'였습니다. 그는 그림자를 부정하고 환상(아니마)만을 쫓았습니다.
독에 중독된 트리스탄이 금발의 이졸데를 기다릴 때, 흰 손의 이졸데는 거짓말을 합니다. "배의 돛은 검은색입니다."
이 거짓말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남편의 마음속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을 확인한 여인의 처절한 복수, 즉 '형살(刑殺)'의 집행입니다. 말 한마디로 상대를 죽이는 것.
트리스탄은 절망 속에 죽고, 뒤늦게 도착한 이졸데도 그의 시신 위에서 숨을 거둡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사회적 질서(관성)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랑(식상)은 필연적으로 육체의 소멸을 통해서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마크 왕은 두 사람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두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나 서로 얽혀 하나가 되었죠. 사람들은 이를 아름다운 사랑의 결말이라 칭송합니다.
명리학적으로 이것은 '지지 육합(地支 六合)'의 물상입니다. 천간(하늘/정신)에서는 찢어졌으나, 지지(땅/현실)인 무덤 속에서 뿌리가 엉켜 비로소 합을 이룬 것입니다. 살아서는 원진(怨嗔)이었으나, 죽어서야 비로소 육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까 해피엔딩입니까. 이것은 중세 기독교 문학이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타협점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라. 대신 너희의 영혼은 전설로 남겨주마." 억압된 욕망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박제가 되어, 후대의 낭만주의자들에게 영원한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는 낭만적인가? 아닙니다. 이것은 '도파민 중독'과 '현실 도피'의 서사입니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미약이 없습니다. 대신 데이팅 앱과 썸이라는 가벼운 접속, 그리고 금방 식어버리는 인스턴트 감정이 번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묘약을 마시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그 무거운 사랑을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갈구합니다. 왜그럴까요? 우리의 사랑에는 '관성(제어장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어장치가 없는 욕망은 증폭되어 머물지 않고, 쉽게 휘발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명리학적 조언은 냉철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합(合)이 아니라, 충(沖)을 견디는 것이다."
미약을 마시고 몽롱한 상태에서 맺는 관계는 허상입니다. 그것은 융이 말한 '아니마의 투사'일 뿐, 실존하는 타인을 사랑함이 아닌 것입니다.
숲속에 놓인 검(Sword)을 보십시오. 그것은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경계선'입니다. 그 경계선을 지우기 위해 죽음을 택하거나 묘약을 마시는 것은 미성숙입니다.
현대인의 사랑이 가벼운 이유는 검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책임지기 싫어서, 적당한 거리에서 '안전한 사랑'만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찔리고 베이는 고통 없이, 어떻게 타인의 우주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죽음으로써 신화가 되었지만, 우리는 살아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의 묘약 따위는 없습니다. 멀쩡한 맨정신으로, 서로의 지루함과 비루함을 견디며, 숲속의 검을 넘어 손을 잡는 것. 그것이 미약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갖춰야 할 사랑의 격조(格調)입니다.
"사랑은 기적이 아니라, 끔찍한 현실을 함께 건너는 징검다리다.
환각에서 깨어나라.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을 느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