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라 & 마즈눈, 타들어가는 흙(土) 위의 절규
여기 닿을 수 없는 갈증으로 사막을 헤매다 끝내 자신의 이름마저 지우고 연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아 소멸의 지독한 사랑이 있습니다. 살아서는 관습의 벽에 막혀 절규했으나 죽어서야 비로소 한 줌의 흙으로 뒤섞여 영원을 얻은, 가장 비극적이고도 완전한 영혼의 합일(合一)을 이룬 7세기경의 남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사막은 거대한 뼈무덤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수분이 증발하고, 오직 본질적인 고통만이 하얗게 남습니다. 7세기 아라비아, '카이스'라는 이름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카이스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마즈눈(Majnun)'이라 불렀습니다. '진(Jinn, 정령)에 들린 자', 혹은 '미친 자'라는 뜻이지요.
그의 광기는 '레이라'라는 이름의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 가문의 반대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혔을 때, 카이스의 영혼에는 쩍, 하고 금이 갔습니다. 그는 문명 밖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아니, 스스로 걸어 나갔습니다.
옷을 찢고, 짐승들과 뒹굴며, 모래바람 속에 시를 뱉어내는 삶. 이것은 단순한 실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귀문관살(鬼門關殺)'이라는 유령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벌어지는, 가장 처절하고도 신비로운 붕괴의 기록입니다.
명리학에서 귀문관살은 신경이 예민하고, 직관이 뛰어나며, 한 가지 대상에 집착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운을 뜻합니다. 마즈눈의 사주를 물상(物象)으로 그려본다면, 그는 물 한 방울 없는 '조열(燥熱)한 사막의 흙(戊戌/丁未)'과 같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흙은 물(水)을 갈구합니다. 그에게 레이라는 생명수이자, 유일한 구원인 재성(財星)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물길을 막자, 갈 곳 잃은 열기는 내부로 폭발했습니다.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억압된 욕망의 회귀'입니다.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이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아가 파열된 상태였던 것이지요.
마즈눈은 '신약(身弱)'했습니다. 그는 부족 사회의 규범이라는 거대한 관성(官星, Law)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퇴행'이었습니다. 언어와 예법을 버리고, 원초적인 본능만이 지배하는 사막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레이라의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 속에 투사된 '레이라의 환영'과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었을까요, 아니면 거대한 자기 최면이었을까요?
마즈눈은 사막을 떠돌며 수천 편의 시를 썼습니다. 사람들은 그 시를 아름답다고 칭송했지만, 그것은 사실 '식상(食傷, 표현)'의 에너지가 피처럼 흘러나온 결과였습니다. 명리학에서는 이를 '식신제살(食神制殺)'의 실패로 봅니다. 자신의 표현으로 고통(칠살)을 극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 표현이 자신을 갉아먹는 칼이 되어버린 형국입니다.
애착 이론으로 보자면, 마즈눈은 전형적인 '불안정-집착형 애착(Anxious-Preoccupied Attachment)'을 보입니다. 레이라가 없으면 자신이 소멸할 것 같은 공포. 그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간신히 붙들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레이라는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사주에서 남편을 뜻하는 관성(官星)은 울타리가 아니라 감옥이었습니다. 그녀는 사회적 규범이라는 구조적 폭력 안에서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녀의 입은 닫혔으나, 마음은 마즈눈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소리 없는 비명이 되어 내부 장기를 파열시켰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육체의 병을 통해 영혼의 말을 대신했습니다.
결국 레이라는 병으로 죽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마즈눈은 그녀의 무덤으로 달려가, 그 위에서 울다가 숨을 거둡니다. 실존 심리학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죽음은 끝일까요, 아니면 진정한 자유일까요?"
이 연인들에게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해방'이었습니다. 사회적 금기, 가문의 반대, 육체의 제약... 이 모든 관성(官星)의 억압이 사라지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즈눈이 레이라의 무덤을 끌어안고 죽은 순간, 명리학적으로는 '천합지합(天合地合)'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늘과 땅이 합쳐져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수피즘(Sufism)에서는 이들의 사랑을 신비주의적 합일로 해석합니다. 레이라는 신(God)의 은유이며, 마즈눈은 신을 갈구하는 구도자의 상징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사랑이 좌절됨으로써, 그 에너지가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도화살'이 '화개살(華蓋殺, 종교와 예술)'로 변모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가장 성스러운 기도로 바뀌는 역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승화'를 위해 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 육체의 고통이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들은 신화가 되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레이라와 마즈눈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사랑을 핑계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대의 마즈눈들은 사막 대신 스마트폰 속으로 숨습니다. 닿을 수 없는 대상(아이돌, 가상의 연인, 짝사랑)을 이상화하고, 현실의 관계가 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회피형 애착'이나 '불안형 애착'의 늪에 빠집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신약(身弱)한 자아가 만들어낸 슬픈 방어기제입니다.
명리학은 차갑게 조언합니다.
"재성(사랑)을 감당하려면, 먼저 내 일간(Self)이 튼튼해야 합니다."
내 삶의 뿌리가 사막의 모래처럼 흩날리는 상태에서는, 어떤 사랑도 신기루일 뿐입니다. 마즈눈의 사랑은 위대했으나, 그의 삶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신화 속의 비극을 동경하되, 현실에서는 그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땀 냄새를 맡고, 밥을 나누어 먹으며, 구질구질한 현실을 함께 견디는 '생활의 감각'입니다. 귀문(Ghostly Gate)을 닫고 현실의 문을 열 때, 비로소 사랑은 '광기'가 아니라 '삶'이 됩니다.
"사랑은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살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막의 시인이 되지 말고, 부디 옥토(沃土)의 농부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