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와 균형감
외국 여행을 가면 볼 수 있는 한국인들의 특성들을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 특성들 중에 하나는 "아침 7시부터 칼같이 일어나 호텔 조식을 챙겨먹고, 오전 8시면 이미 여행지로 떠날 준비를 다 마친다"는 것. 아마 어려서부터 '근면성실하게 살아야한다'는 어른들의 말씀과 '어른들의 말씀은 항상 잘 들어야한다'는 모범생 세뇌 교육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이런 현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과거 심리학회에서 만난 한 외국 대학 교수가 자신(심리학과 허태균 교수)에게 한국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에 대해 언급하며, "도대체 너희 한국인들은 왜 그래?"라고 물어봤다던 한 일화가 생각이 났다.
지난 주 싱가포르 여행에서 내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싱가포르 여행 5일차를 맞던 날, 처음 싱가포르 도심지에 진입해 말로만 듣던 마리나 베이 샌즈를 보고 신나서 들떠있었다. 한국으로의 귀국일은 점점 다가오고, 내게 남아있는 여행 시간을 알차게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이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시간이 오후 6시 정도를 가리키고 있을때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가서 뜨거운 샤워와 함께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올라왔다. 쉽게 올 수 있는 싱가포르가 아니기에, '남아있는 저녁 시간에 여행 일정을 하나라도 더 소화해야한다'는 강박적 근면성실함과 '숙소에 돌아가서 일찍 쉬고싶다'는 본능적 욕구가 내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후자를 택했다. 구글 지도앱에서 숙소를 도착지로 설정하고, 타고 있던 자전거를 숙소 방향으로 돌렸다.
숙소에 도착하기 5분 전, 내 이마에 떨어지는 무언가 차가운 것을 느꼈다. 우기였던 싱가포르에 쏟아지는 소나기 폭우였다. 순간 등 뒤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30분 전, 체력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여행 일정을 강행했다면, 지금쯤 야간 크루즈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크루즈 배 안의 실내 공간에서 비는 피했겠지만,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무엇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막막했을 스스로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한국에서 챙겨갔던 카드는 현지 오류로 인해 그랩 택시 어플 이용이 불가능했고, 자전거로 숙소에 복귀한다면 우산도 못 쓴 채 흠뻑 젖은 상태로 찝찝하게 돌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던 조금 전의 나 자신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이 때 절실히 느꼈다.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재화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효율성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 때로는 지혜롭게 일정을 절제하고, 일과 휴식 사이에 균형을 맞출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실함은 분명히 장점이 많다. 매일 주어지는 '한정'된 자원(시간)속에서 개인의 '한정'된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하고 시간을 밀도있게 씀으로써, "의미"있게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한국인의 특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쉬는 시간을 갖고, 여유를 찾는 시간에조차 한국인은 "잘" 쉬어야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휴식에서도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주변 친구들의 일정관리 플래너를 열어보면 10분 단위로 촘촘히 세워진 일정 속에서,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며 쉴 지까지 다 계획되어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의 뇌에는 "잘"이라는 조건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험 잘 보고, 잘 살아야 하고, 잘 지내야한다. 본래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자본주의 시스템 속 지나치게 효율성이 강조되다보니 그 의미가 변색된 것 같다. 일을 "잘"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획일화된 한국 사회의 관념 대신, 일과 휴식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더 "잘"해야함을 가르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