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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Nov 10. 2022

아무것도 아닌 비밀

영화 <비밀과 거짓말> 리뷰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돌아다니다 언덕길 위에 카페가 하도 예뻐서 올려다보다 주차장 턱에 걸려 바지 무릎이 찢어지도록 심하게 넘어졌다. 지나던 사람이 다가와 걱정스레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창피함이 먼저인지라 괜찮다고 말하며 부랴부랴 도망쳤다. 하얀 거짓말’(white lie)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아주 가끔 내가 그리고 네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비밀을 담는다. 그리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이 늘어난다. 심지어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한다. 그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에 내가 속는 것이니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영혼의 무게가 21그람이라 하는데 비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비밀과 거짓말>의 가족들은 서로 내놓지 못한 비밀과 거짓말로 인해 오해로 냉담하거나 마주친다 싶으면 충돌한다. 키친싱크 리얼리즘의 대가답게 커다란 사건 없이 나의 혹은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감독(마이크 리)의 시선이 <비밀과 거짓말>에서 펼쳐진다. 연극연출가이기도 한 그답게 <비밀과 거짓말>은 부부, 모녀, 남매, 친구 등, 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바뀌며 진행되는 옵니버스식으로 연극적 구성의 흔적이 강하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연극적 구성이지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삶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감독의 섬세한 시선으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는 오히려 잔잔한 감동으로 빛난다. 감동은 마침내 화해하는 따뜻한 결말이 주는 안도감에서 오기도 하지만 당신이 숨긴 비밀을 꺼내보니 그 비밀은 사실 별것이 아니었다는 감독의 다독거림에 있다. 그러니 당신을 그토록  고단하게 하는 그것들을 꺼내어 말하고 새털처럼 가벼운 날들을 살아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가 시작되자 흑인들이 모인 장례식에서 한 흑인 여성의 슬픈 얼굴이 클로즈 업 된다. 곧 이은 장면, 신부의 웨딩 촬영을 하는 모리스(티모시 스폴)가 등장한다. 렌즈를 들이대자 신부의 콧등에 떨어진 미세한 속눈썹을 발견하고 떼어내는 모리스. 아무리 꾸며도 아름다움에도 흠이 있고 몇 초의 미소를 가장하지만 곧바로 차가운 냉기로 돌아가는 부부의 위선이 있다. 인종, 나이, 성별, 직업이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심지어 동물도 카메라의 주인공이 되지만 렌즈에 잡히는 건 이렇듯 찰나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인 것은 아니며 거짓조차도 그들의 일부이니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닌 세상이다. 천사와 괴물, 흑과 백, 진실과 거짓, 죽음과 삶의 새로운 시작이 뒤섞여 들어앉아 있는 복합적 양태야말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진관의 주인이자 8개의 침실을 가진 집을 소유한 중류층의 모리스는 카메라 앞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 아름다움과 좋았던 순간을 남겨주려는 사진사이다. 심지어 교통사고로 심하게 한쪽 얼굴이 괴물처럼 망가진 여인의 얼굴에서도 아직은 아름다움이 남은 다른 쪽의 얼굴을 렌즈에 담는다. 사진은 반대편의 얼굴을 비밀로 감춘 반쪽의 진실인 것이다. 그런데 숨겨진 얼굴도 나의 반쪽이라며 세상에 드러내는 용기는 호텐스(마리안 장 밥티스트)라는 젊은 흑인 여성에게서 시작된다. 자신을 낳았지만 얼굴을 보지도 않고 입양시킨 백인 엄마 신시아의 부끄러움, 죄책감조차 털어내도록 돕는 그녀야말로 흑과 백이 하나인 자신 그리고 우리의 본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짚어보면 모리스의 조카가 되는 호텐스의 직업이 검안사라는 설정은 예사롭지 않다. 좋은 모습을 남기도록 사람들 얼굴의 흠을 떼어내고 사이가 좋지않은 부부에게서도 잠시의 미소를 끌어내기를 애쓰는 삼촌 모리스는 선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 사람들의 결점은 삭제된다. 그러나 나빠진 시력을 도와 그에 맞는 안경을 쓰도록 도와주는 검안사 호텐스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아서 혹은 흐릿해서 놓쳤던 세상의 흠을 오히려 보도록 돕는다.  그 흠은 마음안의 것이어서  모리스조차 떼어내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호텐스는 그야말로 심안(마음의 안경)을 가족들에게 쓰게하는 것이다.  

    

어긋나는 마음들     

   모리스는 간헐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예민한 아내 모니카(필리스 로건)와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해결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살고 있다. 착하기 그지없는 그는 그럼에도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의 날선 마음을 다독거린다.  그렇다고 모니카가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처럼 불안한 것은 아니며 마음 한편에 따뜻함 또한 품고 있는 여성이다.  어느 날, 모리스가 거실에 놓인 조카 록산나의 사진을 보고 조카의 21살 생일 축하 파티를 열고 싶어하자 모니카는 오랫동안 냉담해 왔던 신시아와 록산느를 초대하기로 한다. 조카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미소짓는 모리스는 영낙없이 조카를 사랑하는 삼촌인데 어찌해서 누나와 멀어졌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박스 공장의 노동자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가는 신시아는 늘 자신에게 화가 나있고 제마음대로인 딸 록산나(클레어 러시브룩)와 산다. 록산나는 사사건건 자신의 사생활에 개입하고 혹여 딸이 임신을 할까 봐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 끼어드는 엄마가 짜증스럽다. 10대 어린 시절 남자들에게 버림받고 미혼모로 딸 아이를 힘겹게 키웠던 신시아가 생활이 방만한 딸아이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똑같이 걸어갈까 봐 노심초사인 것이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리 없는 록산나는 용수철이 튕기듯 짜증과 돌발행동으로 늘 엄마와 충돌한다.      

  감독은 어느 정도 영화가 진행될 때까지 영화 속 남매, 부부, 친구 사이에 미움과 갈등을 일으키는 비밀의 이유를 쉬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화적 비밀을 안긴다. 관객을 해답으로 이끄는 것은  호텐스이다. 16살에 낳은 아이를 보지도 않고 입양 보낸 흑인 딸 호텐스의 예상치 못한 출현에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던 신시아도 인내심을 가진 호텐스의 설득에 진실을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부정하고 싶은 오점이었을지 모르나 신시아는 호텐스와 소소한 대화와 음식을 나누며 오랜만에 밝음과 웃음을 회복한다. 자신을 버린 무책임한 엄마를 원망하기보다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딸이 더없이 고맙고 소중해진다. 화해와 치유의 촉매는 이해이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의 용기이다.


  결국 신시아는 록산느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모리스의 집에 자신의 공장 동료라고 거짓말을 하고 호텐스를 초대한다. 오직 딸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신시아의 초대는 긴장과 어색함을 감당해야 하는 호텐스의 어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초대에 응한 호텐스의 실체를 술에 취한 신시아가 결국 고백한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파티를 망친 신시아에게 화가 난 록산느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는 모리스 부부 그리고 호텐스. 그 혼란중에 가족의 비밀이 또 하나 드러난다. 이기적이어서 아이조차 낳지 않고 집안 꾸미기에만 정신이 없다고 비난했던 모니카가 사실은 불임이고 아이를 가져보려는 노력이 번번히 실패했다는 사실에 신시아는 미안함과 연민으로 올케를 껴안는다. 나와 너의 상처가 될까 그토록 묻었던 비밀이 오해와 갈등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연극적인 영화답게 클라이맥스에서 갈등이 폭발하고 마침내 영화의 결말은 카타르시스 후에 찾아오는 정화이다. 이때 모리스가 말한다. “마침내 말했군! 세상이 두 쪽 나지도 않네”. 그토록 우리가 천기누설인 것처럼 봉인하고 살았던 것은 내놓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일상이었다.    

 

  혼란이 정리되고 세 모녀가 초라하지만 햇빛드는 신시아의 집 마당 의자에 앉아 있다. “이런게 사는 거지“라고 하며 너무도 행복한 신시아와 흑과 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록산느와 호텐스의 대화는 여늬 자매들처럼 따뜻하고 가볍다. 이때 신시아의 대사는 모리스의 대사이기도 했다. 어느 날, 자신이 경영하던 사진관을 모리스에게 팔고 호주로 떠났던 친구가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꿈이 무너져버린 친구가 자신이 넘긴 사진관을 성공적으로 키운 모리스을 보고 느낀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시니컬한 태도는 안정된 직업,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를 곁에 둔 모리스에 대한 부러움과 자궤감의 애두룬 표현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모리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사진관을 나서는 그의 등 뒤에서 모리스의 아내가 ‘그럴 줄 알았다’며 한심해하자 모리스가 말한다. ‘사는게 다 그런거 아니겠냐고’. 그야말로 인생은 '새옹지마'이고 뒤늦게 후회해보아도 소용없는 현실에서 속칭 루저가 된 사람의 숨은 마음을 모리스는 어렴풋이 헤아려본다.


  그렇다고 영화가 이 가족에게 완벽한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화해는 혼란뒤에 오는 잠시의 휴식일지도 모른다. 삶은  다른 상황, 경험들이 만드는 불협화음의 연속일 것이고 서로의 생각들은 숨겨지고 내놓는 열림과 닫힘을 반복한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 였느냐는 호텐스의 질문에 신시아는 끝내 함구하며 비밀로 묻는다. 그것을 내놓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니 질문의 대답이 나온다. 비밀과 거짓말은 때로 너를 위한 나의 사랑의 표현임을 가족들은 깨닫는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포용과 이해가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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