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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Sep 20. 2022

자, 어서! 괜찮아 소리쳐봐!!

영화 <컴온 컴온> 리뷰

 굳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를 들여놓지 않더라도 동화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귀한 고전의 가치를 지닌다. 산 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적은 나의 책상 위에도 생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오래된 친구처럼 꽂혀있다.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사막의 별처럼 빛나는 어린 왕자의 영혼을 만난다. 만인이 사랑하는 안데르센은 또 어떤가?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라고 외친 순진한 아이의 목소리는 내가 본 것, 느낀 것을 말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자기방어적 침묵을 부끄럽게 한다.      

   영화 <컴온 컴온>(C’mon C’mon)은 우리에게 주변의 아이들과 교감하면서 순수의 세계를 느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심한 우리에게 괜찮으니 웅크리지 말고 세상을 향해 속마음을 외치고 몸을 움직여 행동하라고 용기를 준다. ‘컴온 컴온!’ 자 이제 주눅 들지 말고 떠들어봐, 소리쳐봐! “블라블라...”. 의미 따위랑 잊고 그저 되는대로 외치세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해 병이 날 것 같은 이발사가 흙을 파고 그 안에 소리를 묻었다는 동화는 때로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묻는 아이대답하는 어른

  조니(호아킨 피닉스)는 미국 전역을 돌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삶과 미래에 대해 인터뷰하고 녹음을 기록하는 라디오 저널리스트이다. 어느 날 자유롭게 혼자 살던 그에게 어머니 죽음 이후로 소식을 끊고 지냈던 여동생 비브(가비 호프만)에게 전화가 온다. 떨어져 있는 조울증이 있는 남편을 돌보기 위해 집을 비우는 동안 어린 아들 제시(우디 노먼)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이다. 여동생과 사이가 서먹해진 이후로 9살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거의 본 적이 없는 조카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나의 생각과 세상은 엇박자로 어긋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 어긋남이 내가 얼마나 나만의 좁은 상상력 속에 갇혀 있는가를 되짚어 보게 한다. 조니는 그저 어른이 아이를 돌보는 일이려니 하고 조카를 임시 맡았지만 영리하고 조숙한 이 아이가 도통 다루기가 쉽지 않다. 결혼한 적도 아이도 키워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때때로 부모가 없는 고아가 되는 상상력으로 삼촌을 당황하게 만들거나 주말 아침이면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커다랗게 틀어놓고 거실을 뒹굴거리고 맘에 안들면 내키는 대로 사라져버리는 아이의 엉뚱함에 조니는 당황하기 일쑤이다. 조니는 그동안 전국을 돌며 다양한 아이들, 청소년들과 인터뷰를 하고 느끼면서 나름대로 아이들의 세계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부딪히는 실전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심지어 그동안 아이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미래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자의 역할만을 하였던 조니에게 제시는 마이크와 녹음기를 빼앗아 대신 조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제 묻는자에서 대답하는 자로 조니의 역할이 역전된다.   

  

 제시는 삼촌의 흉내를 내면서 삼촌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녹음한다. 그렇게 조니의 마음은 제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말해진다. 자신도 알 수 없는 혹은 알면서도 숨겨왔던 그의 마음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은 형상화된다. 쓰는 것, 말하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한 기본적 출발점이다. 내 안의 마음을 꺼내어 자신을 대상으로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 대답이 시작된다.

    

 삶은 이야기의 조합이고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 부끄럽다면 나 혼자만의 중얼거림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니는 밖에서는 질문하는 사람이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일기를 쓰듯 자신의 하루를 이야기하고 녹음하며 자기 독백을 저장한다.  그런데 이 엉뚱한 조카가 빼앗은 마이크를 삼촌에게 들이댄다. 아이는 혼자 사는 삼촌이 외롭지 않은지, 왜 엄마와 사이가 멀어졌는지 등, 조니가 미뤄왔던 혹은 대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을 질문한다. 지금까지 혼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에 생명력이 붙는다. 소통의 시작이다. 소통은 '나와 너' 사이에 성립하기 전에 '나와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 질문들을 곱씹으며 찬찬히 제시에게 대답을 하는 조니. 모른 채 묻어둔 마음을 꺼내어 보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지난 시간들 속에 있었다. 흑백 사진같이 흐려진 시간들을 되짚어보니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헤어진 여자 친구, 멀어진 여동생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 다름 때문에 서로 대화를 포기해 버린 아쉬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어른을 말하게 하는 당돌한 아이, 말썽꾸러기 아이는 우유부단하게 서성이던 어른들에게  선물이 된다.     


  그렇다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는 꼭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주로 함께 한 조니와 제시의 좌충우돌 소소한 사건들을 엮어가지만 조니와 여동생 비브, 제시와 엄마가 전화를 통해 나누는 소통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스피커 폰으로 셋이 함께 소통하기도 한다. 마음이 있으면 멀리 떨어진 공간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열린 마음은 열린 공간, 열린 시간을 안아야 얻어진다.

 

우린 혼자가 아니야그리고 우린 자유로워!

  <컴온 컴온>은  가족이 다시 화해하고 성장하는 낭만적 가족 영화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장’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다고 혼자 울지 말 것이며 넘어졌다고 주저앉지 않을 일이다. 그건 끝이 없는 삶의 조건이니 우리는 그저 세상으로 나아가 걷고 말하고 살아낼 일이다. 그래서 감독 마이크 밀즈는 다큐멘터리와 영화적 이야기, 가족과 그 밖 세상의 어른과 아이들, 아픈 과거와 지금의 후회 그리고 산업주의가 퇴락한 디트로이트에서 LA, 번화한 뉴욕과 너른 공원, 오클랜드 이민가, 재해가 많은 뉴올리언즈등의 도시와 자연을 부지런히 교차시키면서 조니와 제시를 성장으로 이끄는 한편의 로드 무비를 만든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고 하지만 움직이는 만큼 성장하기도 한다. 움직이는 만큼 넘어지고  다치기도 하니까 그 말이 그 말 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수직적 시간과 수평적 공간으로부터 풀려난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작은 슈퍼마켓,  버스 안으로부터 넓고 복잡한 도시, 뉴욕의 아름답고 넓은 센트럴 파크 그리고 섬세한 펜화로 그린 듯한 아름답고 넓디 넓은 나무 숲 속, 아니면 조그만 삼촌의 아파트 어두운 밤, 한 침대에 누운 삼촌과 조카가 괴물놀이를 한다. 몸을 함께 했던 기억은 말로 기억되는 순간보다 훨씬 진하게 서로에게 스민다. 그렇게 멀어진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기적은 우연찮은 순간순간들에서 일어난다.      


  이제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고 제시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멀리 떨어지니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시작되는 일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남매 조니와 비브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화해의 허그를 하고 제시는 좀 더 밝고 의젓한 아이로 변화했다. 희망은 아팠던 과거의 온전한 치유가 아니다. 어차피 시간을 흘러갔고 세상은 변화무쌍하니 때로 넘어지도 괜찮다는 의연함, 외로워져도 따뜻한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든든함을 얻었으니 그것이 치유이다.   

   

  헤어지면서, “우린 다 잊어버려”라고 단언하는 조니에게 당차게 제시가 말한다. “난 아니에요”. 그래서 그들은 헤어지고 난 후에도 미처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녹음기에 넣어 서로에게 이야기를 남긴다.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이 좋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자신을 아끼는 부모가 있어도 고아 같은 아이의 소외감, 넓은 세상을 떠돌고 사람들을 만나도 나만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은 서로 사랑하고 기억하는 우리에게 틈틈이 방문하는 자연스러운 손님이다.


  ‘자연스럽다’라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모나지 않게 잘 어울린다는 것이니 자연을 벗삼아 사는 우리의 외로움은 절망의 조건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 조니는 제시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간다. 아무런 꾸밈이나 억지가 없는 자연은 억누른 마음과 목소리들을 바깥 세상으로 맘껏 외치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우리에게 용기를 실어준다. 마침내 자연 속에서 자유로워진 조니가 제시에게 말한다. “안 괜찮아도 돼. 회복 구간에서 벗어나 있을 때 화나도 되고, 슬퍼도 낙담해도 당황해도 돼. 발차기도 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돼.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I’m not find. C’mon. resonable response). 그러니 모든 것이 “괜찮아 괜찮아”(C’mon C’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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