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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Aug 26. 2022

영화의 기억, 그 걸음들

지아장커 <스틸 라이프> 리뷰

  

   계급과 세상의 모순을 바라보는 봉준호의 <기생충>은 불편하고 실랄하다.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사는 가족은 치열하다. 지상으로 탈출하기 위해 굴곡진 계단을 오르고 거짓과 살인을 하더라도 지상의 멋진 저택에 들어앉기 위해 심지어 지하에 갇힌 자들과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아프다고 꼭 소리 내야만 아픈 것이 아니듯이 날이 서지 않고도 자본주의와 눈부신 문명의 성취 뒤에서 삶이 뿌리 뽑힌 채 서성이는 가난한 민초들의 박탈과 아픔을 영상에 그리는 이가 있다. 


  <스틸 라이프>는 저항이 아니라 수용의 미덕을 가르친다. 자아장커의 시선에서 불공평한 세상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부딪쳐가고 변화하는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그래서 <스틸 라이프>에서  가난한 인물들은 위, 아래로 뛰지 않으며 덤덤하게 평행으로  걷는다. 프로스트의 시 구절처럼 "길은 길에 연하여 있으므로".

 

  <스틸라이프>의 원제인 ‘삼협호인’(三峽好人)에 대해 감독 지아징거는 “단순히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삶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이라고 피력했다. 2002년 개혁 바람이 몰아치던 중국이 배경인 영화는 마지막 장면 곧 철거될 오래된 시멘트 건물 사이 공중에서 조심스레 외줄을 타는 사람의 검은 실루엣으로 끝난다. 또한 사전적으로 ‘정물화’ 또는 ‘여전히 삶’의 의미를 함의한 <스틸 라이프>는 거칠게 파괴되고 변방으로 내쳐지더라도 여전히 삶에 순응하며 묵묵히 걸어나가는 민중의 생명력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그래서 <스틸라이프>는 그들에게 보내는 묵묵한 헌사이고 힘없이 사라져 곧 잃어버릴 옛것들에 대한 근심이 깔려있다.    

 

   지아장커는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불안전한 세상에서 불안전한 사람들이 겪는 흔들리는 삶에 대해 냉소적이지도, 그럼에도 나아지리라는 낭만적  감상에 젖지도 않는다. ‘고요한 삶’(still life)을 사는 <스틸 라이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변방으로 내몰리고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어도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영화는 풍요와 상승, 빛나는 위용 뒤에 내쳐진 가난, 하강, 음지는 그것조차 삶이라고 읊조린다. 마치 하나의 태양아래 양지와 음지는 하나이듯이... 


  그래서인지  주윤발을 흉내내며 헛 폼을 잡던 한 청년이 돌더미 아래 깔려 죽어 붉은 보에 쌓여 강물에 떠내려 보내져도 그들의 표정은 담담하다. 상승의 욕망으로 뒤끓는 세계와는 무관한 수 천년의 시간을 안고 있는 산과 강이 품고 있는 시간 속으로 마크는 돌아간다. 변하고  있지만 변함없이 우리의 곁에 있는 자연으로의 귀환, 그 귀환의 미래가 지아장커가 마크와 그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위로이다.     


수몰된 역사를 위로하는 사탕 한 알     

 

 그렇게 <스틸 라이프>의 카메라는 파괴되어가는 역사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보류한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 될지라도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진솔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들에게  목전에 다그친 가난에 대한 한탄이나 눈물은 사치이다. 어떻게든 한 푼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 등에 걸머진 몽둥이로 자기가 살던 터를 스스로 부수는 민중들의 재산은 돈이 아니라 몸이다. 그 몸을 지탱시키는 것은 국수 한 그릇이요 그나마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정은 값싼 술과 담배, 차 그리고 한 알의 사탕이며 그들에게 이런 작은 것들의 나눔이 한알의 밀알처럼 위로가 된다. 

     

  2006년, 2천년의 역사가 간직된 산샤에도 개혁의 물결이 분다.  영화 중간,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쫒아가던 화면에 갑자기 하늘에 UFO가 나르고 그로테스트한 모습으로 남아있던 폐건물이 로켓처럼 날아오르는 초현실적인 장면은 맥락을 벗어난 뜬금없는 파격이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라는 산샤댐 옆에 수몰되가는 1750채의 집과 낯선 거리로  나선 110만명의 이주민이 뒤섞인 풍경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이다. 여여한 자연 풍광곁에 우뚝 선 철제 다리와 고층 빌딩 틈 사이에 낡은 티셔츠를 걸어놓은 옷걸이의 낯선 조합도, 쇠로 지어진 오래된 공장이나 큰 건물이 버튼 조작 하나로 수초만에 풀썩 가라앉는 풍경도 초현실적이다.     

 

   그런 세상에, 후줄근한 런닝을 입고 허름한 가방 하나를 둘러멘 산밍(한산밍)이 배를 타고 이곳에 왔다. 16년 전 산샤(三峽)로 가출한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구겨진 담배 갑 껍질에 쓰여진 주소 하나만을 달랑 들고 낡은 여객선을 타고 산샤에 도착한다. 배에 탄 처음부터, 흰 백지가 달러, 유로화, 중국화로 변하는 마술사에게 강제로 관람료를 갈취당하는 것은 산밍이 이곳에서 겪을 험난한 시련을 암시한다. 어디든지 데려다 준다고 호기롭게 달리던 오토바이가 찾아간 집은 수몰되었고 아내를 찾을 길은 막막하다. 이렇게 막막한 외지에 남은 산밍에게 다가간 쾌할한 마크는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그에게 막막함을 견디게 하는 위로였다. 그러나 사탕 한 알을 산밍에게 남기고 불량배 무리에 끼어간 마크는 주검으로 발견된다. 폐허가 된  돌더미 밑에 깔린 마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발신음을 추적한 핸드폰의 덕이었다. 문명은 괴물과 천사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야누스이다.      

마크를 떠나 보냈지만 산밍은 수소문 끝에 아내를 만난다. 그러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딸은 멀리 돈을 벌기 위해 떠나있고 아내는 늙은 선주에게 묶여있다. 아내의 몸값은 3만 위안. 오빠가 동생을 판돈이다. 다시 헤어지기 전, 파괴된 건물 안에 쪼그려 앉은 아내는 산밍에게 토끼 사탕 반알을 건넨다. 페허가 된 시멘트 벽의 구멍으로 멀리 그로테스크한 건물이 흡사 괴물처럼 버티고 있다. 반 알의 사탕이 이 무시무시한 세계를 견뎌낼 힘이 될까?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위험한 탄광으로 향하는 산밍에겐 그 사탕 반알이 희망의 씨앗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길     

  영화에서 두 축은 산밍과 셴홍(자오타오)이지만 두 사람은 영화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각자 아내와 남편을 찾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떠돌지만 대조적인 두 사람의 삶의 조건은 평행선을 횡단하듯 서로 다른 길을 헤매게 한다.  

  2년 전부터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아 산샤에 온 간호사인 셴홍은 전문직 여성답게 절제된 단아함이 풍긴다. 수소문 끝에 그녀가 가까스로 찾게 된 남편은  현대적 공장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곁에는 그 사업장의 사장인 젊은 여자가 있음을 셴홍은 짐작하게 된다. 세속적인 성공에 맛이든 남편이 더 이상 이전에 사랑하던 남편이 아님을 직감한 셴홍은 이혼을 통보하며 상하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겨진 자가 남편인지 셴홍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털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셴홍의 돌아선 걸음이다. 그렇지만 아내를 되찾을 3만 위엔을 벌기위해 위험한탄광으로 향하는 산밍의 선택 또한 그 자체로 가치롭다. 문제는 그 선택들이 남기는 외로움이고 그럼에도  그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들이다.  같이 걸었던 사람들이 갈라진 길에서 각자 자신의 길로 들어섰을 뿐이다.   

   


영화는 다시 산밍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배 안에 옹기종기 들어선 다양한 사람들을 근접 촬영한 영화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마지막 장면은 건물 사이에 매인 외줄을 타는 한 남자의 작고 검은 실루엣을 멀리 비추며 끝난다. 외줄 위에 올라 선 사람은 산밍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변해가는 세상을 살아내는 모두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산밍에게 살아갈 힘은 아내와 딸을 다시 되찾으려는 희망에서 온다. 마오쩌뚱이 새겨진 지폐의 뒤쪽에 인쇄된 중국의 수려한 자연의 풍광은 동전의 양면같이 음과 양이 공존하는 세상의 모순이지만 반쪽 남은 풍광의 기억의 가치는 더없이 소중하다.     


마크: 이건 무슨 담배에요?

신밍: 16년 전에 제일 좋은 담배였어

마크: 향수로군요.

신밍: 지난 시절을 기억하는거지.     

 다시 가방을 을러메고 아내의 몸값을 벌기 위해 탄광을 향하는 산밍과 무리들의 걸음은 그토록 그리운 집, 가족에게 언젠가는 되돌아가리라는 희망의 걸음이다. 비록 그 걸음이 느리더라도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은 간신히 존재하는 삶의 안간힘을 지탱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죽지 않고 <스틸 라이프>(여전히 삶)를 사는 역사를 이어간다. 그러고보면 역사는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매 순간을 겯는 민초들의 삶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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