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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Nov 12. 2022

당신의 여름은 찬란했나요?

<알카라스의 여름> 리뷰

 한쪽 알이 빠진 선글라스를 쓰고 고물차에 앉은 장난꾸러기들이 찍힌 포스터를 보고 순수한 동심과 전원생활을 담은 목가적인 영화를 기대했던 나의 예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천방지축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과 끝없이 싱그럽게 열린 복숭아의 수확에 정신없는 대가족의 한 여름의 뜨거운 에너지는 모두 생명력으로 빛났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이 될 가족의 여름 수확이었고 아이들은 모든 것이 놀이터인 자연을 떠밀리듯이 떠나야 한다. 알카라스에서 복숭아 농장을 하던 할아버지와 삼촌에 대한 기억이 담긴 자전적인 영화는 감독(카를라 시몬)의 어린 시절의 향수이자 그 땅을 지키던 가족에 대한 헌사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풍경, 그 맛, 그 사람들에게 바치는 감독의 존경과 사랑은 영화 속 어린 손녀 이리스(아이네트 주누)가 흥얼거리는 노래에 담긴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끝내고 모든 가족이 모여있는 소박한 저녁, 코믹한 분장을 한 아이가 할아버지를 위해 노래(“난 내 목소리를 뽐내려 하지 않아요. 난 내 땅을 위해 노래해요. 단단한 땅 나의 사랑...”)를 한다. 땅과 친구를 그리워하는 이를 담은 노래가 맑은 구슬처럼 흘러나오자 멜로디를 맞춘 가족의 합창과 함께 할아버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그렇지만 베를린 영화제 황금 곰상에 빛나는 이 영화의 가치는 평범한 한 가족의 서사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바삐 사느라 그동안 잊었던 나를 키운 가족과 나를 살린 자연의 모든 생명들의 노고와 희생을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뿌리 없는 내가 없는 자명한 진리를 잊은 채 살아온 삭막하고 이기적인 시간들에 영화는 듬뿍 물을 뿌린다. 전국 행사와 축제장을 돌며 9천 여명의 오디션을 거쳐 영화적 인물과 비슷한 배경과 기질을 가진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고 90시간의 필름을 2시간으로 골라내는 편집을 통해 감독은 허구적 영화에 사실적 다큐멘터리를 섞어 그해 여름을 저마다의 기억으로 선물한다. 감독이 말했듯 “누구에게나 가족은 있고 모든 나라에 농업이 있는” 평범하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조건 때문이다.  

    

  알카라스는 스페인 카탈루나의 한 농촌 이름이다. 이곳 농장에 여름이면 가족의 성(姓)조차도 ‘솔레’(태양)인 3대가 복숭아 수확을 위해 모두 모인다. 강렬한 태양과 싱그럽게 영근 복숭아, 포도와 과일들 그리고 분주하게 복숭아 수확을 하는 가족의 땀과 활기가 화면에 그득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토록 보기 좋은 넘치는 풍성함과 가족의 활기가 곧 밀려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복숭아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그 땅에 태양광 패널을 짓겠다는 땅 주인의 계획 때문이다. 스페인은 플라멩고처럼 열정적이고 생명력이 넘친다. 40도가 가까운 스페인의 여름 그리고 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풍요로운 올리브 나무들, 햇빛에 익은 붉은 토마토의 맛은 깊다. 이곳에서 광활한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며 살아온 3대에 걸친 가족의 삶도 지금까지는 풍요로웠다. 그렇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스페인 내전 당시 할아버지가 그 땅의 주인이었던 귀족 파뇰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준 대가로 구두로 받은 땅은 계약서라는 문서를 들이대는 젊은 후손에 의해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그 자리에 들어서는 건 유령처럼 검은 태양광 전지판들이다. 대신 그가 가족의 아버지 키메트(조르디 푸홀 돌체트)에게 제시한 조건은 태양광 패널판의 관리인이다. 아버지는 “난 농부지 잡역부가 아니다”라며 일언지하 거절하지만 그에게 대안은 막막할 뿐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족의 서사이지만 공감각적인 맛이 입안으로 들어오고 점점 커지는 소리들은 귀가 아니라 몸통을 울리리만치 입체적이고 강렬하다. 색깔과 모양이 각양각색인 복숭아가 허름한 바구니에 담기고 나무궤짝에서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도 생생하며 아이들이 두 손을 바치고 서리한 깨진 수박물을 하늘로 목을 젖혀 넘길 때 여름날의 단맛은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그러나 그 소리와 맛은 곧 농사를 헤친다고 토끼에게 쏘아대는 아버지의 총소리와 평온한 가족의 저녁과 고요한 어둠이 깔린 밭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거친 포크레인의 소리에 맥없이 스러진다. ‘삶은 순환’이라는 철학적, 실존적 사유도 당장 닥친 위기를 견디며 희망을 기다리기에는 너무도 무력하다.      


 영화의 도입부 고물차를 우주선 삼아 놀이를 하던 아이들 앞에 무서운 굉음과 함께 내려앉은 건 우주선이 아니라 무서운 포크레인 이었다. 곧 포크레인은 아이들이 타고 놀았던 파란 고물차를 종이처럼 구겨 올렸다. 초월적인 그 풍경에 아이들은 공포인지 경이로움인지 모를 표정을 짓는다. 복숭아 알처럼 커지고 얼음처럼 언 그 아이들의 눈과 입이 너무도 예쁘지만 마냥 낭만적일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그 포크레인이 3대 가족의 식탁과 웃음 그리고 땀과 노동이 키웠던 복숭아들을 뿌리째 넘어뜨린다. 복숭아를 먹어댄다고 아버지가 죽인 불쌍한 토끼들은 결국 기계와 자본 그리고 계약서라는 규칙에 밀려날 자신의 모습인지라 더욱 서글프다. 여간해서 가족들에게 힘듦과 눈물을 보이지 않는 우리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딱 한번 영화에서 운다. 아들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에 화가나 거칠게 운전하다 트럭 뒤의 수확한 복숭아들이 나무 궤짝에서 주르르 땅으로 굴러 떨어질 때이다. 아무리 애써도 지킬 수 없는 가족과 땅. 대책 없이 굴러떨어지는 한알 한알의 복숭아들이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문제는 밀고 들어오는 세상의 압력에 맞서야 할 가족들 내부의 균열들이다. 이제 삶의 끝자락에 있는 과묵하고 인자한 할아버지는 저물어가는 시대를 일으켜 세울 힘이 없고 가장의 책임감을 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쳐 복숭아를 지킨 아버지도 시대를 이길 힘이 소진되어간다. 그렇지만 그도 세상의 변화를 모르지 않으니 모든 부모가 다 그렇듯 자신의 아들만큼은 공부를 해서 세상의 변화에 걸맞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농장을 사랑하는 아들 로제르(알베르트 보쉬)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복숭아밭 한 귀퉁이에 돈이 될만한 대마초를 키우다 아버지와 충돌한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딸 마리오나(세니아 로제트)도 맘껏 젊은 청춘을 즐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다. 태양광 패널 사업에 끼어든 고모의 변심을 알지만 침묵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가족의 분란을 굳이 일으키지 않으려는 어른스런 마음이다. 맞서 무너지는 것보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는 고모의 선택을 비난할 수도 없다.   

   

  이 영화의 공감력은 부계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우직한 성실함에서 기인되지만 때로 유연하고 때로 말보다 침묵 그리고 부엌과 농장을 종횡무진 오가며 가정을 지켰던 여성들에게서도 온다. 나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니 나를 먹이고 키우고 공부시킨 힘의 원천은 어머니의 생활력과 희생이었다. 영화에서의 어머니 돌로로스(안나 오틴)도 농장은 물론 개성이 각양각색인 대가족을 이끌어 가지만 아무런 짜증이나 불평없이 묵묵히 삶을 헤쳐나간다. 땅과 복숭아밖에 모르는 보수적인 남편, 이제 자기 생각들이 있는 아들과 딸, 새것에 적응하기에는 너무도 나이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게다가 말썽이 곧 놀이인 어린 딸 사이에서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지켜주는 여성이다. 그러던 그녀도 남편처럼 딱 한번 강하고 간결하게 마음을 내보인다. 어느 날 남편과 아들의 뒤틀린 기싸움을 보고 두 남자의 뺨을 차례로 때린다. 서로 하나가 되도 시원치 않을 위기에서 등돌린 부자의 아집에 보내는 분노와 경고의 메시지이다.     


  대가족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만큼 사건도 많고 할 말도 많아 소란스럽고 부산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갖가지 사건들과 고비를 넘긴 가족들이 땀으로 거둔 풍요로운 식탁에 모두 모여있다. 서로 의견이 달라 주먹을 날렸던 여동생 가족과도 화해를 한 듯 모처럼만에 웃음이 넘친다. 그러나 그때 밖에서는 천둥과 우뢰같은 괴성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파란 자동차를 장난감처럼 구겨 들어 올렸던 포크레인이 정말 외계에서 온 괴물처럼 태양빛에 익어가는 복숭아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땅에 깊게 상처를 내며 헤집는 광경이 모처럼의 안도감을 공포로 뒤바꾼다. 그러나 더 무섭고 슬픈 건 포크레인 뒤에 숨은 강요된 계약서와 이익이 궁극적 목적인 경제 논리이다. 농부들이 헐값에 구매하고 큰 이익을 얻는 대형마트 유리창에 복숭아를 던져대고 목이 터져라 억울한 사연을 외쳐보지만 그 소리는 밀려드는 세상의 힘에 밀려 곧 사라져갈 처연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햇빛과 땀을 먹고 자란 붉은 복숭아의 단맛이 대형마트 유리창에 붉은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무너지는 1차 산업, 사막화 되어가는 땅, 빼앗긴 일용직 이민자들의 노동 그리고 순환의 고리가 끊긴 건강한 먹거리와 생태의 위기는 경제성장에 몰입한 성취와 진보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림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근심과 소멸의 위기를 모르는 채 마냥 이 여름이 즐겁고 신이 난다. 나의 그해 여름도 그랬었다. 그때는 국민학교라 불렸던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이 되면 방학 숙제 보퉁이를 싸 짊어지고 기차를 타고 갔던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너른 시골집과 소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초가집 마을들, 작은 몸무게를 실어 마중물을 부어야 물이 나오는 물펌프 위를  푸른 포도 넝쿨의 그늘이 지붕처럼 덮여 있었다. 그리고 벼가 익어가던 논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던 나의 기억도, 저녁밥을 짓던 굴뚝의 연기도 내 기억의 풍경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 세상을 떠나셨고 그 땅에 지금은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고 금싸라기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곡식과 과일의 땅이 사라진 자리에 돈나무가 자란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복숭아밭 옆의 메마르고 건조한 들판보다 더 크게 푸른 농장을 롱 쇼트로 화면에 담았던 건 그럼에도 살아있는 자연과 삶의 생명력에 보내는 경의이리라. 그래서 <알카라스의 여름>은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라져 버릴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그럼에도 살아냈고, 살아내는 지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푸르른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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