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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24. 2023

우연도 알고 보면 필연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리뷰

  나비효과.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이민 문제를 두고 부부의 대립으로 출발하는 영화는 가족들의 충돌로 번지더니 두 가족의 비극적 붕괴를 목전에 둔 채 끝이 난다. 자기 입장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란스러웠던 시작은 어른들의 분란을 막아보려 했던 딸 테르메(사리나 파르하디)에게 상처를 안기며 묵묵한 침묵으로 끝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별거’(seperation)는 나와 너, 이란과 미국으로 나뉘는 물리적 분리로 시작해 우리의 내면에 분절되고 휘어지는 진실의 허약함을 들여다본다. 자신이 옳다고 내 것이 진실이라고 외치던 부부의 목소리가 잦아 들지만 그 뒤에 딸아이의 눈물이 남는다.  

    

  평범한 일상 속의 사건을 쌓아 올리며 개인과 사회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아쉬가르 파라디의 작품답게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했다. 딸의 미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 이민을 원하는 아내 씨민(레이라 하타미)과 중증 치매가 걸린 아버지를 버릴 수 없는 남편 나데르(페이만 모아디)가 별거에 들어간다.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 대신 아버지와 딸을 돌볼 가사도우미 라지에(사레 바이아트)를 구하게 되지만 라지에가 아버지 손을 침대에 묶어놓고 잠시 외출한 사이 아버지가 떨어져 죽을 뻔 했다. 게다가 나데르의 화를 가속시킨 것은 딱 하루 일당만큼의 돈이 지갑에서 없어졌다는 것이다. 절대 돈을 훔치지 않았다고 라지에가 극구 반박하지만 극도로 흥분한 나데르의 고함은 커져만 간다. 자신 그런 와중에 흥분한 나데르가 계단을 거쳐 문밖으로 라지에를 밀쳐내고 며칠 후 임신 4개월인 라지에의 아기가 유산된다. 이슬람에서는 4개월 이후의 태내 아기는 한 인간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라지에와 남편 호얏(샤하브 호세이니)은 라지에를 밀었던 나데르를 고소한다. 자칫하면 살인죄를 뒤집어 쓸 판이니 나데르의 가족과 라지에의 가족의 진실 공방이 갈수록 과격해진다. 누구말이 진실인가를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가는 영화는 외피적으로는 진실 게임을 둘러싼 가족극이지만 계급, 젠더, 가치관, 종교관이 엉킨 인간끼리 부딪히게 되는 실존적 윤리극이 된다.

   

이성적 원칙과 종교적 계율

  이 영화의 질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을 알았는가이다.  두 번째 질문은 나데르의 밀침이 라지에 유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는가이다. 만약 나데르가 임신을 인지한 상태에서 라지에를 밀었다면 그는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변명할 여지가 없이 악인이 된다. 결국 영화는 나데르 구하기에 성공하지만 진실도 거짓도 무너진 싸움에서 상처뿐인 승리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견 은행원으로 커리어를 쌓아온 나데르는 주유소에서 주지 않았던 거스름돈을 팁으로 남겨놓자는 딸을 채근해 굳이 거스름돈을 받아오게 할만큼 완고한 원칙주의자이다. 비록 자식에게 세상살이를 한 수 가르쳐주려는 훈육의 의도였더라도 유연함이나 동정심이 없는 그의 원칙은 차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원칙의 견고함이 시험대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버지와 딸을 돌보아 주기 위해 고용된 라지에가 잠시 외출한 사이 아버지에게 사고가 난 것이다. 비록 치매인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침대에 손이 묶여있는 아버지가 낙상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나데르의 이성은 이 사건으로 마비되고 고용인에 불과한 라지에는 환자 방임과 절도범으로 몰려 쫒겨난다.  

   

  그러나 영화는 의심하는 자와 의심받는 자의 위치를 전복시키면서 점입가경의 진실 게임으로 치닫는다. 나데르와 라지에의 설전 와중에 넘어진 라지에가 아기를 유산하게 된 것이다. 피고로 몰린 나데르는 라지에의 임신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한다. 거실 한쪽 방에서 딸을 가르치러 온 가정교사에게 라지에가 임신을 알리고 산부인과 전화번호를 묻는 과정의 대화를 나데르가 들었다면 그의 밀침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살인이 된다. 그때 옆방에 있었기 때문에 전혀 듣지 못했다는 나데르의 주장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추궁하는 딸에게 사실 그때 그 말을 들었다고 고백하는 나데르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너무도 격앙된 상태라서 그 소리를 확실히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 아니면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무의식이 작동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믿을 수 없는 재구성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가 들었음을 인정한다면 그에게 닥칠 위기는 엄청났다. 평생 자신을 지지해 왔던 이성과 원칙,  커리어가 모두 무너질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거짓말은 딸을 거짓말하게 하는 연쇄 파장을 일으킨다. 아버지가 정말 가정부와 가정교사의 대화를 듣지 못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딸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아직 갓 중학생에 불과한 어린 딸의 얼굴에 거짓말과 타협한 양심의 그늘이 드리운다. 말할 수 없는 속내와 거짓의 무게 때문인지 간유리와 두터운 벽을 사이에 둔 분리 공간안에 섬같이 떠도는 인물들의 표정이 외롭고 무겁다. 

     

 

선의와 악의의 판단은 결과론적인 것일 때가 많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단순 논리는 과정의 가치를 생략한다. 사실 나데르를 고소한 것은 라지에의 남편 호얏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라지에의 선의였다. 라지에는 치매 환자인 나데르의 아버지가 방뇨를 해서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당황하지만 전화를 통해 랍비의 허락을 받고서야 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씻길 정도로 신실한 종교적 인간이다. 그런 그녀이지만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나데르의 아버지가  길로 나서서 차에 치일뻔한 사건 이후로 급히 외출을 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아버지를 침대에 묶는다.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한 선의 였지만 그로인해 아버지가 생명을 잃을 뻔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쫒겨난 여자와 쫒아낸 남자의 상황이 역전된다. 라지에의 가족은 나데르를 고소하고 법정에서 두 가족의 공방은 점점 가속화되어 험악한 분위기가 되어간다. 비록 이혼을 목전에 두었지만 아내 씨민은 보석금으로 남편의 구속을 막는다. 비록 온전한 부부의 상태는 아니지만 아내로서 위기의 남편을 구하는 방법도 다르다. 과격해진 남편을 보다못해 감금하게 하는 판사에게 라지에는 눈물로 남편의 용서를 빌어 남편을 구한다.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삶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종교적 계율의 준엄함, 법적 차가움을 인간의 측은함과 동정심이 채운다. 그 작은 연민이 답없는 미로에서 헤매는 인간을 잠시나마 위로한다.     


  인간의 연민이 일말의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건 낭만적인 궁여지책의 변(辯)일지도 모른다. 돈의 현실적 위력이 죄의 판단을 유보시킨다. 딸의 가정교사도 중산층인 나데르의 편에 은근히 선 것을 안 호얏은 분한 마음에 딸의 학교 앞을 어슬렁거리며 위기감을 조성한다. 딸의 안전을 걱정한 씨빌이 합의금을 나데르에게 제안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꼴이라며 나데르는 일시에 거절한다. 비록 아기를 잃고 아내가 수모를 당했지만 구두 수선공으로 10년째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되어 빚에 쫒기는 호얏에게 그 돈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호얏의 빚을 받기 위해 빚쟁이들까지 모인 상황에서 합의의 결정적인 순간 라지에가 용기를 낸다. 거짓말을 하면 어린 딸의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는 종교적 계율에 대한 두려움이 차후 남편으로부터 받을 폭력과 가난을 감당하게 한다. 나데르의 아버지가 차에 치일뻔할 사고를 막다가 차에 받힌 라지에가 몸의 이상을 느껴 아버지를 묶어 놓고 잠시 병원을 찾았던 것이다. 그녀의 진실 고백은 합의금으로 적당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을 흔들어버린다. 간신히 오명을 벗어나긴 했지만 나데르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원칙을 버리고 거짓을 말한 것은 딸에게 그리고 자신의 삶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게 된다. 부모의 이혼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나데르의 딸과 일터까지 꼭 데리고 다니던 라지에의 어린 딸이 교감하던 순수한 웃음과 미소도 이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옅은 적의의 인상을 남기며 화면이 닫힌다.   

 



  영화의 시작, 씨민과 나데르가 나란히 앉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시끄럽도록 설전을 벌이던 법정 장면이 법정 복도에서 갈라선 채 묵묵히 딸의 선택을 기다리는 부부의 쓸쓸한 장면으로 끝난다. 엄마와 아버지 중 누구를 선택하겠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씨민과 나데르도 관객도 딸의 답을 듣지 못한 채이다. 딸의 대답이 무엇일까가 남는 질문이라면 질문이겠지만 거짓이 끼어든 진실, 돈이 끼어든 가족애, 자신만이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양보 없는 힘겨루기의 싸움을 지켜본 딸의 선택의 대답은 지연된다. 숨겨진 선의와 드러난 악의의 싸움 끝에 남겨진 개인과 가족의 비극. 그럼에도 모든 것의 시작은 선의였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감독이 남겨둔 질문에 키에르 케고르가 대답한다. “인생은 해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하는 현실"이라고. 늘 진행형인 경험적 삶이니 무엇이 우선이고 진실이고 선의일까에 대한 정답은 없다. 시험때마다 교과서 정답을 딸에게 가르치던 나데르의 태도는 처음부터 언젠가는 상처받아야 할 문제적 인간의 기본 설정이었을 것이다. 딸과 가족을 잃고서야 얻는 승리와 안도가 정답일지 오답일지는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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