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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an 23. 2023

슬프고도 따뜻한 이별

<랜드> 리뷰

  누구나 살면서 가슴 아픈 이별을 겪는다. 더구나 그것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죽음이었다면 남은 사람의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다. 그렇다고 묵묵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지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위로의 무력감을 확인할 뿐이다. <랜드>는 아픈 사람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오랜 시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죽음의 문턱에 선 한 여자를 구하는 이야기이다. 진부할 정도의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랜드>는 압도적인 자연의 영상미와 함께  가족을 떠나보낸 남녀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화면에 담는다.  슬프지만 크게 울지 않고, 궁금하지만 묻지않는 절제된 언어와 감정으로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랜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감독인 로빈 라이트가 믿음과 사랑으로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에 보내는 묵직한 헌사 이기도 하다.

   

  이디(로빈 라이트)는 총기 난사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어떤 말로도 헤아릴 수 없는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운 이디에게는 곁에서  안타까워 하는 여동생 엠마(킴 디킨스)의 위로마져도 모진 고문이 된다. 도저히 견딜수 없어 이디는 행복했던 삶의 흔적이 새겨진 도시를 영영 떠나고자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과의 이별에 분노가 차오른 듯 이디는 길거리 쓰레기통에 내팽개치듯 핸드폰을 던져 넣고 도피하듯 광활하고 거친 아이오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다. 세상과의 차단을 위해 타고 올랐던 차와 트레일러까지도 그곳까지 안내했던 사람에게 견인해 가도록 부탁한다. 죽은 자 혹은 잊혀진 사람이 되려는 완벽한 고립이다. 기대한대로 그녀가 들어선 자연은 이디의 사연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품는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대가는 혹독하다. 도시에서 겪었던 마음의 고통은 여전했고 게다가 육체적 고통이 그녀에게 더해진다. 그나마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동안은 잠시라도 슬픔은 잊혀졌고 더없이 아름다웠던 봄, 여름, 가을까지는 자급자족의 꿈을 꾸어 볼 만 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고가 삶을 흔들었던 것처럼 자연은 숨겼던 발톱을 드러내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잔혹함을 이디에게 휘두른다. 겨울이 온 것이다. 그것도 그 광활한 아이오와 깊은 산중에. 그러나 아무리 배고파도 새끼 옆에 있던 어미 사슴에 겨누던 총구를 울며 내려놓는 이디. 어미없이 남을 어린 생명이 불쌍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남은 자신이 슬퍼서 운다. 그나마 그녀의 연명을 도왔던 물고기가 숨쉬던 계곡도 얼어붙고 지천으로 자란 야생의 풀들도 죽은 듯 얼어붙고 시들어버렸다.      

  생존을 위해 이디가 준비한 것은 한 박스 정도의 참치 캔과 음식 그리고 몇 벌의 옷들 뿐. 어느 날, 혹독한 겨울과 눈보라를 뚫고 거대한 곰이 나타나 장난감처럼 집을 부수고 쟁여놓은 캔마져도 먹어치우고 분탕질을 치고 떠났다. 전혀 예기치 못한 야생의 공격에 아무 먹거리조차 남지 않은 그녀가 절망한다. 목숨을 부지할 음식으로 한 마리 토끼를 잡을 줄도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산속에서 부는 눈바람에 얼어 죽지 않아야 할 땔감,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그녀는 탈진한 채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간다. 죽음 대신 산을 택한 건 삶에 대한 애착 때문도 아니고 "제발 자신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애원하던 여동생 때문이었으니 죽음과 함께 그녀의 고통도 끝마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 산속에서도 불쑥불쑥 이디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던 남편과 아이의 환영과도 만날 수 있겠지.  

 


  


  그녀의 위기를 지나가던 사냥꾼 미겔(데미안 비쉬어)이 발견한다. 겨울 사냥에 나서곤 했던 그는 이 오두막에서 간간 피어오르곤 하던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오두막 문을 열고 죽음의 목전에 있던 그녀를 발견한다. 마을에서 급히 간호원 알라와(사라 던 플레지)를 불러와 따뜻한 물을 먹이고 체온을 회복할 옷가지를 덮어주고 마을 병원으로 내려가기를 권하지만 이디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사는 것이 고통이니 죽음이 그리 두려울 것도 없는 이디이다. 결국 미겔이 가끔 그녀에게 들러 사냥을 위한 총쏘기와 덫놓기 등 자급자족에 필요한 생존 방식을 하나씩 가르쳐주면서 산에 적응해 가도록 돕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는다. 질문은 관심이 아니라 상처를 헤집는 것임을 알기에. 고통스러운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    


        미겔:  “지금 기분이 어떤지 말해줄 수 있어요?”

        이디: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는 게 힘들어요.” 
         미겔: “남들과 감정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거군요.” 
         이디: “대체 그걸 왜 공유하려 애써야 할까요. 어차피 남들은 공감 못할 텐데…. 
         미겔: “그럼 고통 속에 혼자 있게 되잖아요.” 
         이디:  “…….”


   관객은 이쯤에서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기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품격은 절제된 감정과 상처가 아물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인간과 자연의 태도에 있다. 서로 나누는 말은 최소한이지만 점차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두 사람의 우정은 깊고도 따뜻하다.  "왜 나를 돕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내가 가는 길에 당신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답한다. <랜드>는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당연한 선행의 가치를 반성하게 한다. 이유나 목적이 선행(善行)의 선행(先行)조건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삶이 없듯 그들의 관계도 서서히 끝이 나게 된다. 여전히 그에게 거리를 두고  세상의 이야기를 자기에게 전하지 말라고 하며 마음의 벽을 허물지 않던 이디이지만 이즘들어 소원해진 미겔이 궁금해진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방문이 기다려졌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반려견과 함께 미겔이 나타나 반려견을 이디에게 맡긴다.  자신이 어딘가 오랫동안 멀리 가야할 것  같다며...그리곤 미겔의 어린 조카가 그렸다는 그림을 선물하자 불현 듯 생각난 듯 이디가 오두박 선반 위 박스안에 넣어두었던 어린 아들의 그림을 조카에게 전해달라며 미겔에게 건넨다.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자 절망의 벼랑에 섰던 한 여성을 세상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 방식이 너무도 담담해서  가슴이  아프다. 


   그가 떠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그가 걱정된 이디는 단단히 준비한 배낭을 짊어지고 반려견과 함께 길고 긴 산길을 걸어 마을로 내려온다. 미겔의 공백이 세상과 단절을 결심했던 그녀를 산 아래 마을로 걷게 한 것이다. 그녀가 가진 정보라고는 자신의 목숨을 살린 간호원의 이름뿐이었지만 다행히 작은 마을에서 알라와를 어렵지 않게 만난 반가움도 잠시, 이디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이별이었다. 말기 후두암으로 미겔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이디는 애써 슬픔을 누르며 인디언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미겔은 일시에 슬픔을 웃음으로 바꿔놓는다. 미겔은 이디가 자신을 찾아 올 것일지 아닐지를 알라와와 내기 했는데 자신이 이겼다고 그가 웃는다. 그리고 이디가 미겔이 ‘요다’를 닮았다고 하자 ‘요다’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그에게 이디는 ‘스타워즈’를 숙제로 남긴다. 슬픈 웃음을 작별의 인사로 나누는 두사람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우정의 끝이 슬프고도 애잔하다.    

 

  웃음 뒤에 미겔이 고해성사를 하듯 그녀에게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죄책감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취중운전으로 인한 사고 때문에 가족이 죽었고 짊어졌던 죄를 이디로 인해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그저 “가는 길에 있어” 위험에 처한 이디를 도왔던 미겔의 선행이 부메랑이 되어 미겔을 용서받게 한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신비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이다. 이디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마움에 미겔의 손을 잡았던 것도 잠시, 산으로 다시 향하는 이디에게 미겔이 자신의 핸드폰을 이디의 손에 쥐어준다. 그 핸드폰에는 산중 고요한 시간에 이디와 미겔이 앉아 낮은 소리로 부르던 노래가 담겨있다. 추억은 잊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는 무언의 징표이다.  이디가 세상과 다시 소통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아. 

   

 오두막으로 돌아온 이디가 그토록 잊고 싶었던 지난 시절 가족의 사진을 꺼내어 한 장 한 장 미소로 맞이하고는 벽에 붙인다. 이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이디가 슬픈 과거를 추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엔딩에서 흐르는 ‘So you remember me’의 가사처럼 기억하는 한 죽지 않는 것이므로. 그리곤 3년 동안 연락을 끊었던 여동생에게 미겔이 주었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그제서야 이디에게 '랜드'는 남편과 아들 그리고 미겔과 더불어 사는 삶의 터가 된다.  고난 끝에  돌아온 집. <랜드>는 영웅이 아니라 한 평범한 여성이 그리는 귀환의 서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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