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Dec 25. 2022

웃음으로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리뷰

  

  어둡고 기괴스럽지만 어린아이의 판타지적 고난과 극복, 시대와 인간에 대한 성찰을 깊이 담아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판의 미로>를 떠올리게 한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가 갖은 모험 끝에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사람이 되는 동화는 이 영화의 서사적 틀이지만 기예르모는 잔혹한 시대와 인간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필멸인 인간이 죽음을 이겨내는 현재적 사랑의 가치에 방점을 찍는다.  

   

  아이, 동물이라는 영화적 소재는 어른들의 단단한 아집이나 편견의 벽을 이완시키는 마법을 가진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로 유명한 스톱모션의 대가인 마크 구스타프슨과 기예르모 델 토로가 공동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피오>는 사랑이 인간의 유한함과 고통의 구원이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기예르모 델 토로가 직접 깍고 색칠을 했다는 나무 인형들의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질감을 한껏 활용한 스톱모션의 영화적 스타일과 아이와 동물의 모험을 엮어내는 이야기에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관객을 함께 울게 하는 제페토의 가련한 눈물이 담긴 슬픈 표정은 당대 최고 배우들이 더빙한 목소리 연기와 하나가 되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위로와 여운을 길게 남긴다.

  

말 안 듣는 피노키오

  세바스티안.J.크리켓(이완 맥그리거)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파시스트 정권의 전쟁 시기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마을에서도 장인으로 인정받는 목수 제페도(데이비드 브래들리)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아들 카를로(그레고리 만)와 더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전쟁은 그 소박한 행복조차 잔인하게 파괴한다. 어느 날 성당에 걸린 예수님 십자가 목상을 마무리 하던 중 전투기 소리를 심상치 않게 여긴 제페토가 서둘러 집으로 가자고 하며 성당을 나서지만 아버지가 준 솔방울을 가지러 다시 성당에 들어간 카를로는 성당에 떨어진 포탄을 맞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절망한 나머지 폐인이 되다시피한 제페토는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마시며 카를로의 무덤 옆에서 울며 지낸다. 

     

 ‘피노키오’는 토스카나 말로 ‘솔방울’이라는 뜻이다. 죽은 카를로와 함께 묻은 솔방울에서 제페토도 모르는 사이 싹이 나고 소나무로 자란다. 어느 날 제페토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찬 도끼로 이 소나무를 찍어내어 카를로를 닮은 나무 인형을 만든다. 제페토가 잠든 사이 이 나무에 살고 있던 귀뚜라미 크리켓의 부탁으로 숲의 푸른 여신이 목각 인형에게 생명과 피노키오(그레고리 만)라는 이름을 준다. 그러나 제페토의 기쁨도 잠시, 온순하던 카를로와는 달리 천방지축 활달한 피노키오에게 실망한 제페토는 피노키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게 되고 아버지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피노키오는 집을 떠난다.      



  말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될 수 없었던 피노키오의 가출의 대가는 혹독하다. 마을 사람들은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는 피노키오를 악마의 주술이라고 수군거리고 신부조차도 피노키오에게 등을 돌린다. 무솔리니를 추앙하며 아들조차 전사로 무장시키는 광기에 찬 파시스트 시장 포데스타(론 펄만)는 불사인 피노키오를 영원한 총알받이를 만들기 위해 소년 훈련원에 보내고 돈에 혈안이 된 극장주 볼페 백작(크리스토프 발츠)은 감언이설로 피노키오를 서커스단의 광대로 만든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의 피노키오는 순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라 웃음으로 미친 전쟁을 비판하는 용감한 전사가 된다. 결국 피노키오는 무대에서 무솔리니를 희화화 댓가로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저승의 푸른 요정에 의해 간신히 되살아난다.     


  몇 번이나 죽음을 당하지만 번번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피노키오를 예수와 유비시키는 것이 과한 상상력은 아니다. 성이 주세페(이태리말로 요셉)인 아버지는 목수이며 팔과 다리에 못자욱이 있는 목각 아이는 성당의 예수를 연상하게 한다. 게다가 예수는 세상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지만 피노키오는 대형 바다 괴물에 먹힌 제페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불멸을 포기하고 희생하기를 주저 없이 선택한다. 제페토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피노키오가 한쪽 팔을 잃은 채 살아난 것은 한쪽 팔이 미완성인 채 성당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 목상이 언젠가는 완성되리라는 희망적 조짐이다.      


소년병 피노키오돈의 노예가 된 피노키오

  ‘천사와 악마’를 나누는 세상의 판단이란 것은 때로 자기 중심적인 편견이며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쉬이 변할 수 있는 불안한 것이다. 제페토와 카를로에게 그토록 따뜻하던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서 피노키오가 말을 하자 악마를 본 듯 경악하고 배척한다. 더욱이 아무리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는 불사의 전사라니! 파시스트인 포리스토에게는 그보다 적격인 총알받이가 없다. 세뇌된 이데올로기는 인간적 사랑조차 잡아먹는 괴물이며 이분법에 경도된 교리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 

     

 카를로처럼 피노키오와 포리스토의 아들도 전쟁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위기에서 피노키오는 두 번 째의 죽음을 맞는다. 전투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떨어뜨린 포탄 때문에 어이없게 죽은 카를로 대신 피노키오는 무솔리니를 희화화한 죄 때문에 죽는다. 델 토로에게 죽음은 때로 어이없음과 우연이 끼어든 운명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그가 죽음을 위로하는 방식은 눈물을 에둘러 가는 웃음이다. 좌절이나 분노보다 반복하는 웃음을 통해 비극과 슬픔을 이겨내는 우리의 뚝심이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 영화에 담겨있다.   

   

  이렇듯 죽음을 좌지우지 했던 강자의 권력도 약자들의 웃음과 단합 앞에서 속수무책이니 이처럼 유쾌한 반전이 없다. 피노키오의 죽음으로 파산 위기에 처한 서커스 단장 볼페 백작 또한 그가 수족같이 부리던 원숭이 스파자투라(케이틀 블란젯)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만 피노키오의 재치가 그를 무너뜨린다. 비록 피노키오가 스파자투라의 꼬임에 빠져 팔리는 신세가 되었지만 피노키오의 의협심에 감동한 스파자투라는 다시 되살아난 피노키오의 편에 선다. 

    

메멘토 모리피노키오!

  신화는 영웅의 고난과 귀환을 노래하지만 델 토로의 신화에서는 한없이 허약한 약자들이 영웅이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비극적 결함’이 비극의 원인이지만 델 토도의 신화에서 약자들의 ‘결함’은 해피엔딩을 향해가는 디딤돌이다. 모자라기에 서로를 껴안는 약자들의 모험 끝에 피노키오와 크리켓, 스파자투라가 합심해 제페토를 구해 집으로 돌아온다.   

   

  마침내 예수의 목상을 제페토가 피노키오와 함께 완성한다. 비록 온유한 카를로를 꼭 빼닮지는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피노키오를 사랑하게 된 제페토의 슬픔도 치유가 된다. 이후 피노키오와 행복한 삶을 누렸던 늙은 아버지도, 크리켓도, 스파자투라도 죽고 홀로 된 피노키오가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다음의 이야기를 우리의 상상력에 남긴 영화의 끝은 가볍고 밝다. 나무가 썩어 다른 생명을 틔우듯 사람이 된 피노키오도 세월이 흐르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 그러나 홀로 된 피노키오의 미래가 애처롭고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고난 끝에 정신적으로 성장한 진짜 소년(real boy)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피노키오의 경쾌한 발걸음이 주는 희망 때문이다.   

     

  어른들을 위한 델 토로의 동화적 판타지는 우리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과 이별의 고통을 그만의 방식으로 어루만진다. “삶에는 큰 고통이 있으니 영원한 삶이 영원한 고통”이라는 그의 철학은 허무나 부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통스런 삶의 끝이라고 죽음을 환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 생명이 사라져 또 다른 생명으로 자라나니” 죽어도 죽지 않은 제페토 그리고 친구들이 늘 함께 하는 피노키오의 모험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어른을 위로하는 프리다의 여름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