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 리뷰
사랑하는 8살 딸아이와 아내를 버리고 택한 동성애 연인이 죽자 폭식증과 은둔으로 인해 272kg의 흉물스러운 인간 고래가 된 찰리(브렌든 프레이저). 과도비만으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으로 지상에서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7일 동안 그는 창조가 아닌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가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그저 타락하고 버려진 인간으로 기억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더 웨일>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유비된다. 그건 급작스런 심정지의 순간에 우연히 그의 집 문을 두드린 선교사 토마스(타이 심킨스)에게 읽어주기를 부탁한 몇 장의 에세이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딸 엘리(세이디 싱크)에게 읽어주기를 부탁한 에세이도 모비딕에 관한 엘리의 독후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17살이 된 찰리의 딸 엘리가 8살에 쓴 이 에세이는 어떤 미사여구나 꾸밈도 없이 아이의 세계에서 느꼈던 감상이 진솔하게 드러난다.-”고래는 불쌍하고 큰 짐승 아무 감정이 없다. 그 고래를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될테니까”.- 자기를 버린 아버지가 죽도록 미운 엘리는 고래를 죽이고 싶은 모비딕의 에이햅을 닮았으며 그 불쌍한 짐승 고래는 어떤 삶의 의욕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찰리로 오버랩된다.
그렇지만 고래가 주인공인 <더 웨일>은 그리 쉽게 찰리를 죽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그렇듯 자신이 저지른 죄책감과 상실의 고통을 짊어진 찰리가 감내해야 할 삶의 무거움은 그의 거대한 몸무게보다도 크며 감독의 연민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그에게 구원을 선물한다. 고래가 바다로 비상하는 결말이 다소 식상한 낭만적 비전에 그치는 아쉬움은 접어두기로 한다. 고통이 근원적인 삶에서 그 무게를 벗어나는 것이 죽음이겠지만 누구도 그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며 떠나는 자의 영혼의 세계는 알 수 없다. 찰리의 마지막처럼 그를 짓눌렀던 몸의 허물을 벗은 듯이 심신이 공중부양할지 혹은 닫혔던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올지를....
종교적 함의를 빌리자면 죄의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한 7일을 위해 찰리를 살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찰리를 돌보는 이는 리즈(홍 차우)라는 아시아계 간호원이다. 때로 강팍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학 응급실에서 야간에 환자들을 살피고 만성피로에 젖어서도 찰리를 찾아와 돌보는 리즈는 찰리의 가족도 연인도 아니다. 그녀는 찰리가 사랑했던 동성 연인의 여동생이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목사 아버지로부터 내몰려 몸을 학대하듯 거식(拒食)을 하다 결국 호수에 몸을 던져 죽은 오빠의 몸을 수습한 리즈. 그렇게 찰리와 리즈는 아픔과 위로를 나누는 동지가 되었다. 불현듯 나타난 선교자 토마스가 권하는 추상적이고 먼 종교적 구원 대신 이 동지들이 나누는 치유는 속물적이다. 치명적인 독이 될 걱정일랑 접은지 오래이니, 먹고 싶은 한 통의 후라이드 치킨을 먹고 피곤한 리즈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잠시의 휴식이 낙담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들을 함께 웃게 한다. 이 모순적인 상황이 그들이 슬픔을 애도하고 이겨내는 묵시적 협약이다.
그런데 이 유대감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리즈는 상태가 위급한 찰리에게 병원 진료를 권하지만 돈 때문에 건강보험을 거부하는 찰리에게 사실은 딸 엘리에게 남겨줄 돈 12만 달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즈의 분노가 폭발한다. “물에 퉁퉁 불은 오빠의 시신을 수습한 것이 나야!”라고 찰리에게 울며 소리 지르는 리즈의 분노는 죽음을 다시 수습해야 하는 타인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찰리의 이기적 마음에 대한 것이었다. 연인이었던 두 명의 시신을 수습하고 홀로 남은 시간을 떠돌게 될 그녀의 생의 무거움이 못내 애처롭다. 신 없는 인간의 구원을 그린 <더 웨일>에서 감독 아로노프스키의 구원은 절룩거리고 공평하지 않다.
이렇듯 감독이 편애하는 주인공인 찰리의 직업은 대학 온라인 에세이 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글쓰기보다 ‘솔직하게 쓰기’를 강조한다. 카메라를 꺼놓고 혐오스러운 자신의 모습은 숨긴 채 ‘정직함‘을 가르치는 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숨겼던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이다. 결국 마지막 순간 그로테스크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 하나 클로즈업 해서 돌려가며 학생들에게 보이고는 진실한 글 한마디를 쓰라는 외침과 함께 모니터를 던져 부수어 버린다. 혐오스러운 모습조차 드러내는 정직함을 마지막에야 되찾는 찰리. 구원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이다.
<더 웨일>에서 죽음에 다다르기 전 찰리가 얻어야 할 구원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자기 자신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용기는 시작에 불과하며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이 찰리의 해피 엔딩이다. 친구나 가족이 그의 죽음을 기억하겠지만 그토록 그가 원하는 것은 자포자기한 짐승 같은 고래가 아니라 세상에 아름다운 인간을 남겨두고 간 아버지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가 죽음의 문전에서 꼭 들어야할 엘리의 에세이에는 바로 "내 인생에 단 한가지라도 잘한 게 있단 걸" 확인하는 찰리의 구원서이다. 죽음을 애도하는 장송곡이나 눈물보다 어린 딸이 지녔던 진솔한 영혼을 담은 에세이는 그에게 한 권의 성서보다 귀하다. 그래서 그는 그 서너장의 에세이를 넘길 때마다 치킨을 뜯던 손가락의 기름기를 티셔츠에 문지르고 그래도 혹여 남은 기름기가 묻을새라 아주 조심스레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 끝으로 종이의 귀퉁이만을 잡아 넘긴다. 비만한 고래가 아니라 여리고 사랑스러운 한 아버지의 모습이 관객의 마음에 애잔함을 남긴다.
엘리가 아버지를 찾아온 동기는 순전히 계산적인 것이다. 찰리의 연락을 받고 마지못해 방문을 했지만 적의로 들끓는 엘리는 매번 냉소적인 말로 찰리를 찔러댄다. 그런 엘리를 단 일주일만이라도 만나기 위해 찰리는 엘리의 에세이를 도와주기로 하고 완성하면 자신이 저축한 돈 12만불을 주기로 한다. 비록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반항이 꽉 들어차 있고 마약을 하고 SNS로 친구에 관해 가시 돋친 독설을 하고 고등학교 퇴학 위기를 일보 직전에 둔 문제아이긴 하지만 찰리는 엘리의 내면에 있는 솔직함과 아름다움을 본다. 이런 엘리에게 찰리가 애타게 말한다. “네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어.”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서 에세이를 찰리에게 읽어주는 엘리는 자신을 진실로 사랑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눈물을 쏟는다.
그때 주체하기도 힘든 몸무게 때문에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었던 찰리가 가까스로 일어나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엘리에게 다가가자 거대한 몸과 두 발이 공중으로 뜨기 시작한다. 일주일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고 문 뒤로는 빛이 눈부신 장면. 결국 찰리를 구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찰리 스스로의 솔직함과 그것을 도운 엘리였다. 관객은 찰리의 신화적 구원에 울지만 그러나 더 큰 것은 눈물겨운 부녀의 서사를 위해 무대 뒤로 물러난 간호원 리즈의 사랑과 우정이다.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쓸쓸하지만 리즈에게 슬픈 고래가 바다로 떠난 것만큼의 안도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네가 구원받는 것이 곧 내가 구원받는 역설은 곧 사랑이다.
퇴학을 면하기 위해 쓰던 엘리의 에세이가 휘트먼이 쓴 <풀잎>의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인 것은 긍정을 향한 감독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둡고 욕망이 들끓었던 <모비딕>의 세계에서 찰리와 엘리가 싸우고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던 것은 풀잎 하나에도 우주가 담긴 이 장대하고 밝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처절한 고투였다.
그러나 떠나간 찰리 뒤에 남는 엘리와 리즈 그리고 엘리의 도움으로 교회와 가족으로 돌아간 토마스의 삶이 그리 가볍지는 않다. 비극과 희극, 행과 불행도 하나의 짝인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래는 여전히 그들의 방에 갇힌 채이다. 삶은 심연 속 오리무중인 멜빌의 고래가 드라마 우영우의 고래처럼 바다를 튀어 오르는 빛나는 비상의 순간을 향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는 고투 끝에 얻어진 찰리의 애처롭고도 장대한 승화는 진부하다는 혹자의 냉정한 평가를 이길 만큼 뭉클한 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