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특별한 인물도, 특별한 사건도 없는 한여름 동안에 일어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 <남매의 여름밤>이 흡인력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이 가족이 보통의 가족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부모의 이혼 후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는 아빠(양흥주)와 함께 살고 있으며 고모(박현영)는 남편과 맞지 않는 결혼 생활로 인해 이혼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옥주의 할아버지(김상동)는 노환으로 인한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낡은 이층집 양옥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moving on>. 사전적인 뜻에 기대어본다면, 삶을 이어가는 ‘움직임’으로 함축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영화는 처음부터 이삿짐이랄 것도 없는 몇 개의 짐을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조그만 다마스 차의 경쾌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한다. 가벼운 느낌으로 편곡된 신중현의 ‘미련’이 흘러나오며 달리는 차의 장면 때문에 재개발로 햇볕조차 잘 들지 않는 비좁은 반지하 방을 떠나는 가족의 방랑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딱히 머물 곳이 없어 가족이 ’여름 방학 동안만‘ 머물게 된 할아버지의 양옥집. 도착한 할아버지 집에는 오랜 삶의 흔적들이 배어있는 가구나 물건들이 곳곳에 눈에 띄고 마당 텃밭에는 포도 넝쿨과 토마토가 햇빛을 한껏 받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오랜만에 본 손주들을 반기는 기색은 커녕 무덤덤한 할아버지가 아들의 식구를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가꾼 밭은 손주들과 할아버지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여름나기의 추억을 빛낼 먹거리를 선물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뜨악했던 가족이 금세 서로 편안한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와중에 “날 괴롭히려고 태어난 요괴”같은 남편과 이혼을 작정하고 집을 나온 고모마저 할아버지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럼에도 여름 밥상의 풍경은 정겹기만 하다. 오랜만에 삼대가 함께 모여 여름 별미인 콩국수, 비빔국수를 나눠 먹고 할머니가 쓰시던 재봉틀을 식탁 삼아 남매는 다툼 후 화해의 라면을 의좋게 나눠 먹는다. 드러나는 부모의 사랑도 있지만 무심하게 집을 지켜온 부모의 공간과 시간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식들에게 풍성한 기억을 안긴다. 이런 순리를 알리 없는 자식들이지만 자식들 또한 잃어버렸던 할아버지의 웃음을 되찾게 한다. 깜짝 생일 파티와 옥주가 준비한 선물에 평생 그런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었을 법한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여름이 끝날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족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길로 나설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이 오래된 양옥집에서 함께 먹던 후루룩 여름 국수 그리고 라면을 받쳐주었던 재봉틀에 스며들던 한낮의 빛을 기억으로 남겨야 할 때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햇빛이 눈부시게 드는 이층 방에서 곤히 단잠에 든 옥주의 모습이다. 한잠이 깨면 이 집을 떠나야 하겠지만 잠시 머무르며 쉬고 먹고 잠자게 했던 할아버지의 쉼터가 가족에게 힘을 불어넣고 씩씩하게 다시 길로 나서게 한다. 가족은 함께 이어도 좋지만 먼저 세상을 떠났어도 한 여름의 추억으로 남은 가족도 좋다. 짧았지만 뜨거움을 식혀주었던 추억이 길 위의 우리를 지켜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