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10년 전 바다에서 사람을 구하다 죽은 장남 준페이의 기일, 멀리 도쿄에 살고있는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까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비록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지만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이는 자리여서인지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 토시코(키키 기린)의 모습은 활기차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 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가족 사이에 놓인 단단한 벽과 틈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가족이 모인 거실 한쪽에 준페이의 영정이 보인다. 비록 기일이지만 집의 풍경은 잔칫날처럼 소란스럽다. 엄마(키키 기린)는 딸 지나미(유)에게 무와 감자의 요리법과 용도를 가르치고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옥수수대에 단단히 박힌 옥수수 알을 어떻게 하면 잘 떼낼 수 있는가를 그의 가족에게 설명한다. 마치 우리 가족에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이..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가족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지 못한 아들을 바라보는 대면대면한 아버지 쿄헤이(히로다 요시오)는 여전히 료타를 죽은 형에 대한 열등감에 힘들게 하지만 아버지가 늙어가고 있는 집안 곳곳의 흔적은 료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엄마와 가까워 보이는 살가운 딸도 내심 부모님의 집으로 와 살고 싶지만 착한 남편과 천진난만한 아이 둘인 가족 안에서 그런대로 행복하다. 재혼한 료타의 새 가족에게 살가운 듯 하지만 내심 낯선 타인을 들이지 않는 냉랭함이 감도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 것도 딸이다.
이 영화에서 가족의 울타리 밖에 있는 단 한 사람은 준페이의 희생이 구한 청년 요시오이다. 10년 동안 준페이의 기일을 찾는 그는 준페이의 가족 앞에서 그는 늘 죄인이다. 그래서인지 긴장한 그의 하는 말은 서투르고 몸에서는 더위와 긴장이 뒤섞여 연신 땀이 흐른다. 제사가 끝날 날 저녁, 그런 그의 모습이 안스러워 료타가 “그가 이제 그만 들러도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희미한 불빛 아래서 뜨개질을 하던 엄마가 미동도 없이 말한다. “그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해 부른거야. 일년에 한번 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더없이 평범하고 자상한 엄마의 마음에 잠긴 서늘하도록 날선 고통의 응어리를 본 료타는 말문이 막힌다. 슬픔은 꼭 눈물을 꺼내어 울어야 슬픈 것은 아니며, ‘아프다’는 말은 아픔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어른들의 상처와 틈을 봉합하는 희망은 아이의 순수함에서 보인다. 료타가 재혼한 아내의 아들인 이츠시의 하얀 백지 같은 순수함에 잉크가 스미듯 낯선 가족의 역사가 스며든다. 쿄헤이는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이 새로운 손자의 꿈을 묻기도 하고 그토록 어색했던 료타에게 함께 축구장을 가자고 말하기도 한다. 낯섦은 이츠시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읽을 사람이 없는데 죽은 토끼에게 편지를 쓴다는 친구의 말에 웃었다는 이츠시가 어느 사이 밤하늘을 향해 죽은 생부에게 지난 하루를 일기 쓰듯 이야기한다. 죽음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새 아빠의 가족에게서 배웠다.
그렇다고 영화가 화해의 천사로 이츠시를 들여놓은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떠나고 뒤에 남겨진 부모는 다음 설에나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쉬움을 달래지만 료타와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 료타는 설 방문을 생각도 안 하고 다소곳이 시댁 방문을 마친 아내는 다음에는 하루 자는 것보다 당일치기가 어떻냐고 한다. 식사 준비 등 번거로움을 어머니에게 끼치지 않고 싶다지만 내심 낯설고 조심스러운 시댁 방문이 편안할 리 없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츠시도 듣고 있다. 어른들의 속내는 어린 이츠시에게 이식된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묻힌 묘소를 찾은 료타의 가족 사이에 새로 태어났을 어린 딸이 보인다. 3년 후 떠나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도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했던 제식을 그대로 흉내내고 하얀 겨울 나비가 환생한 것이 노랑나비라고 어머니가 말하던 동화같은 이야기를 료타에게 들으며 이츠시도 함께 묘지에서 길을 내려온다.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바램도, 아들의 차로 쇼핑을 가고 싶었던 엄마의 소박한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간을 뒤로 돌리면 그 아쉬움을 털어내어 고쳐 살 수 있을까? 후회는 늘 시간을 앞서지 못하고 뒤늦음은 반복된다. 죽음에 대한 아쉬움조차 그저 일상을 이야기하듯 읊조리는 료타의 나레이션과 함께 이 가족이 걸어내려 오는 모습으로 화면은 닫힌다. 나무 게다를 신고 뒤뚱거리며 걷던 엄마의 걸음,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걷던 아버지의 걸음이 추억처럼 남겨진 길을 뒤이어 오는 가족이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생전의 부모님이 좋아하던 이 노래처럼 가족은 서로 다른 속내들을 숨기고 타협하면서도 함께 흔들리는 걸음을 걸어가는 운명적 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