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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Aug 21. 2021

돌고 돌아 다시 떠나는 길에 보내는
경의

영화 <노매드랜드>리뷰

 

  영화 ‘노매드랜드’(감독 클로이 자오)는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이 광활한 미국의 서부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조우하면서 과거에 매인 자신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성장담을 그린 로드무비이다. 그러나 일견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베드윈족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거나 양떼를 몰고 드넓은 몽고의 고원을 유랑하는 유목민과는 달리 21세기 현대인은 캠핑카를 타고 잘 닦인 시멘트 길을 달린다. ’이동‘과 ’길‘ 이 주제인 로드무비가 그렇듯 이 영화는 자의든 타의든 작은 밴(van)을 집으로 삼아 길로 나선 현대판 유랑인들이 주변인이나 공동체에서 어떻게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자연으로부터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도 버리고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 있는 네바다주 엠파이어에 들어와 살던 펀은 불행히도 남편을 병으로 떠나보낸다. 남편이 없는 황량한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 2011년 들이닥친 석고 보드 수요의 감소로 회사는 문을 닫고 마을은 우편번호마져 폐지될 정도로 유령마을이 된다. 오갈데 없이 된 펀은 추운 겨울, 짐들을 대충 창고에 넣어두고 밴 한 대를 사서 개조해 노매드 길을 나선다.      


  겨우 2평 남짓한 낡고 비좁은 밴을 개조해 집을 나서지만 펀은 가까워오는 크리스마스의 캐롤을 흥얼거리며 어둠 속을 운전한다. 밴의 이름은 ’vanguard’(선구자)이다. 이는 펀이 앞으로 다가올 고단한 삶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긍정적 노정을 헤쳐나가리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노매드적인 삶의 긍정적 변화와 성장의 힘에 대해 현대 철학자 들뢰즈는 고정된 자아를 부정하고 자아가 새롭게 거듭나는 생성, 창조, 해방의 에너지를 얻는 사유의 여행으로 ’노마디즘‘을 철학적으로 규정하면서 ’떠돎‘을 신자유주의적, 신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차원의 유랑으로 열어놓았다. 감독 클로이 자오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 철학적 사유를 관객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보고 듣고 느낄수 있는 영화적 공간을 통해 천천히 풀어놓는다.    

  

  비록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의 발판이 된다고는 했지만, 현대판 노매드는 미국 자본주의의 결과이다. 이 영화에는 펀 외에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사람 또는 퇴직 후 즐기기 위해  평생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산 요트를 마당에 놓고 퇴직 일주일 전 갑자기 죽은 친구를 보고 삶의 회의를 느낀 사람, 가족들과 캠핑카 여행을 계획했으나 갑자기 부모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힐링 여행을 시작한 사람, 금융 대공황으로 인한 곤궁한 삶이 힘들어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 자살한 아들에 대한 아픔을 가진 사람, 시한부 암을 앓고 있는 사람 등 우리 주변에도 있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렇듯 펀의 유랑도 자의적이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리듯 시작한 것이다. 밴을 집으로 삼아 유랑을 떠나게 되지만 아버지가 벼룩시장에서 사서 선물한 크리스마스 접시 세트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니 차에 싣는다. 잡다한 짐들과 함께 남편의 체취가 남은 옷들은 창고에 넣어놓은 채 시작된 펀의 출발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과거의 기억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현실적 삶이 뒤섞인 출발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밴은 단순히 차가 아니라 펀의 집이 된다. 우연히 마을 잡화상에서 만난 친구의 딸이 펀에게 ’홈리스‘(homeless)’냐고 묻자 펀은 이렇게 대답한다. ’홈리스‘가 아니라 ’하우스 리스‘(houseless)라고. 즉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하우스‘는 아니지만 머물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나마 웅그리고라도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인 나만의 ’홈‘이 있으니 길거리를 헤매고 노숙을 하는 홈리스는 아니지 않은가. 그 소녀는 펀이 마을 학교의 보조교사로 일할 때 가르쳤던 학생인 듯 펀이 아직도 기억하는지를 묻는 ’맥베드‘의 대사를 외워본다. 왕위에 대한 욕망으로 살육까지 저지르다가 끝내는 죽음을 맞으면서 인간의 삶은 무대 위의 배우와 같으며 잠시 타다가 꺼지는 촛불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읊는 맥베드의 이 유명한 대사는 우리에게 짧은 삶을 자기다운 의미로 채우라는 셰익스피어의 경고가 아닐까 싶다.     


  ’펀‘(Fern)이라는 이름의 뜻은 꽃과 종자 없이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류‘이다. 좀 더 파고들자면, 그리스어로 ’날개가 있는‘(winged)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식물‘(plant)이라는 뜻의 단어가 결합된 것이다. 의미 그대로 공간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세상과 대면하면서 펀은 자신만 도움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노매드들에게도 치유를 돕고 위로를 나누는 친구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떠돎‘은 말처럼 아름다운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의 기본권인 의식주의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자들 틈에 끼여 무거운 돌자루를 나르기도 하고 친구가 된 사람들은 또 각자의 길을 찾아 헤어지고 임시 정착지는 기한이 넘어 떠나야 하며 때론 그 임시 정주지마저 내쫒긴다. 그럼에도 펀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다. 추위에 캠핑카에서 잠을 자는 대신 근처 교회의 무료 숙소를 이용하라는 주유소 주인의 권유를 거절하고 추운 잠을 차 안에서 자는 펀이다. 


  ’노매드랜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침묵하고 사색하게 하는 명상의 영화이기도 하다. 비록 간신히 몸을 누이고 음식을 뎁히고 헤진 옷을 꿰맬 수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펀의 밴은 미서부 네바다주의 거대한 사막을 달린다. 유난히도 이 영화에서는 척박해 보이지만 끝없는 광활한 사막이나 숲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차의 영상을 롱쇼트로 자주 보여준다. 영상은 영화 내내 흐르는 영화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메마른 사막에 윤기를 입히면서 더없이 진한 감동을 선물한다.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는 이탈리아 음악가 루드비코 아우나우디의 잔잔하고 간결한 피아노 운율이 함께하면서 바다와 나무, 작은 새들과 몸집이 큰 동물과 돌 들이 어울리는 거대한 자연과 그 너머 뜨고 지는 여명과 석양의 장엄함이 어울리는 화면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한 편의 지상의 서사시이다.     

 

  그래서 ’노매드랜드‘ 는 예술적이고 시적이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펀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추상적 음악이나 문학이 아니라 실제의 삶 안에서 우연히 만난 길 위의 사람들이다. 비록 떠도는 삶은 고달프고 경제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들은 큰 욕심 없이 일감이 주워지면 열심히 일을 하고 남은 시간 다른 사람들이 집을 손보듯 문제가 생긴 캠핑카를 고치고 누구가는 자전거를 탄다. 또한 펀은 린다와 같이 앉아 일회용 팩으로 마사지를 하기도 하고 데이브하고는 간이 의자를 펴고 앉아 자연을 바라보며 밥을 함께 먹는다. 그 사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성격, 사연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펀이 노매드 길을 떠나서 제일 처음 캠핑카를 멈춘 곳은 ’데저트 로즈‘(Desert Rose) 캠핑장이다. ’사막의 장미‘라니... 아마도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그곳에 장미를 피우는 마음들을 가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사막의 장미는 그 메마른 사막에서도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선인장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이 캠핑장의 차 안에서 펀은 길 떠난 후 처음으로 음식을 해 먹고 잠을 잔다. 작은 산타 등불 빛이 작은 공간을 비춘다. 음식 접시는  남편이 쓰던 낚시통을 개조한 식기 찬장 안에서 꺼낸 아버지가 남긴 것이다.


 그곳에서 펀은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일감이 폭주한 아마존에서 임시 직원으로 일하면서 쾌활한 성격의 린다 메이를 만난다. 린다는 2008년 금융위기로 어려운 시절, 죽기로 결심하였으나 순간 자신만을 바라보는 두 마리 개를 보고 그럴 수 없었으며 자신에게도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린다의 소개로 펀은 ’밥 웰스‘(Bod Wells)가 주도하는 RTR(고무바퀴 유랑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서로 도우며 살자‘ RTR의 취지와 그들이 나누는 도움과 위로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토록 강인해 보이는 ’밥‘도 지금 살아있으면 33살이 되는 아들이 5년 전 자살한 상처로 인해 남들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나중에 펀과의 개인적 대화에서 밥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교감하다 보면 (어떻게 상처를 극복할지) 답을 찾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펀을 위로한다.   

  

  RTR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여성은 곧 75세가 되는 스웽키(Charlene Swankie)라는 노인 여성이다. 펀은 한 팔을 깁스를 한 스웽키를 우연히 돕다가 서로 마음을 나눌 정도로 그녀와 친해진다. 스웽키는 펀에게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이미 뇌까지 전이된 폐암으로 인해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7,8개월. 스웽키는 병원에서 시간 낭비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들을 펀에게 풍경화를 펼쳐내는 듯 이야기한다. 카약을 하며 호수 위에 떠 있는 펠리칸이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높다란 절벽에 둥지를 튼 수많은 제비가 공중을 날고 새끼가 부화한 알의 껍질들이 물 위에 떨어지는 것들을 보았으니 이만하면 완벽한 삶을 누렸다는 스웽키는 이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이제 죽음을 앞둔 스웽키는 추억의 장소인 알래스카로 돌아갈 것이며 유난히 돌을 좋아했던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친구들이 불가에 앉아 돌을 하나씩 던지며 자신을 기억해주면 행복하겠노라고 유언처럼 말한다. 자신의 흔적을 땅에 남기듯이 펀이 잘라주는 스웽키의 흰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곤 어느 날 알래스카를 향해 씩씩하게 스웽키도 떠난다. ’노매드랜드‘에서 펀과 친구가 된 사람들은 마음을 나눌 만 하면 떠난다. 인간의 관계란 맥베드의 대사처럼 타다가 꺼지는 촛불처럼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문제는 우리가 비록 그 순리를 머리로 이해하더라도 가슴으로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떠남‘이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펀은 서서히 그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변화를 보인다. 모든 물건들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스웽키가 떠난 후 강물 위에 자유롭게 둥둥 떠 있는 펀의 나신이 보인다. 뒤이어 거대한 바위의 모래산이 보이고 광할한 사막에 한 그루 우뚝 선 선인장의 모습을 안고 조용히 석양이 진다. 그리고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처럼 코뿔소가 보인다. 그야말로 무위(無爲)의 자연의 품에 편안히 안긴 펀의 모습이다.     

 노매드의 삶은 친구를 떠나보낸 아쉬움에 마냥 머무를 수 없다. 먹고 살아야하는 현실이 목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펀은 캠프지기로 일하게 된다. 펀은 그저 캠프를 관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위 노매드들에게 커피를 타서 돌아다니며 권하기도 하고 캠핑카 여행을 나온 가족이 아이의 생일파티를 할 수 있도록 변압기에서 전기를 연결시켜 준다. 그리고 펀은 RTR에서 만난 데이브(데이빗 스트라탄)를 우연히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현재 그래스랜드 국립공원에서 일하고 있는 데이브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에 매어 있는 펀을 자유로운 삶으로 이끄는 상징적 인물이다. 어느 날 펀은 데이브를 그 공원에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여기저기 구멍이 난 작은 돌에 호기심을 보이는 펀에게 데이브는 돌의 형상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 구멍은 가스가 빠져나간 구멍이라고. 이 돌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져있던 펀의 몸에서 이제는 그리움을 내뱉고 새로운 공기들이 들고 나는 열린 몸으로 돌아오라는 암묵적 은유이기도 하다.     

  이 공원에서 펀은 호기심에 이끌려 혼자 우람한 바위들이 둘러싼 공간에서 신기한 듯 높은 바위 사이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펀은 길을 잃게 되고 미로에 갇힌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 순간 절벽과 같은 높은 바위 위에서 펀을 발견한 데이브가 펀의 이름을 부른다. 미로는 아직도 과거에서 헤쳐나오지 못하고 있는 펀의 처지를 은유하며 데이브는 기억에 갇혀 있는 펀이 현재의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개미가 들끓는 밴을 정리하는 펀을 도와 데이브가 나르던 상자의 밑이 터지면서 펀이 아끼던 아버지가 선물한 접시가 깨진다. 펀은 데이브에게 화를 내고 데이브는 머쓱하게 자신의 차로 돌아간다. 국립공원에서의 사건 이후 데이브가 펀을 변화시키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런 와중에, 펀에게 힘이 되던 데이브도 떠나게 된다. 이미 손주에게 자연 환경적 집을 지어 주려는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린다도 애리조나로 떠났다. 데이브의 떠나게 된 사연은 가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어느 날 펀과 데이브가 일하던 ‘월 드러그’의 대형 햄버거 식당으로 데이브의 아들이 찾아온다. 아들을 만나고 온 데이브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주지 못한 마음의 죄책감을 이제서나마 갚고 싶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펀에게 고백한다. 데이브가 내민 핸드폰 사진에는 데이브의 손자가 될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며느리의 모습이 찍혀있다. 데이브는 늦게나마 아들과 아들의 아이인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삶은 과거에 남긴 후회를 되갚을 기회를 준다. 펀은 데이브에게 아들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차마 데이브의 작별인사를 받을 수 없어서 캠프카를 노크하는 데이브에게 나가는 것을 머뭇거린다. 펀을 만나지 못한 데이브는 펀의 차 앞에 구멍이 난 작은 돌을 징표처럼 남기고 간다.   

   

  자신의 집에 꼭 한번 들르라는 데이브의 말대로 어느 날 펀은 데이브의 집을 찾게 된다.  데이브의 집을 방문한 펀이 말한 첫마디는 ‘당신 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더군요“이다. 이제 데이브의 집은 정갈한 아들의 집일 것이고 펑크가 난 채, 덮개가 씌어져 마당 한편에 방치된 차는 더이상 집이 아니다. 펀은 떠나기 전 홀로 조용히 단정하게 정리된 집안과 아기가 놀던 장난감이 있어 더욱 가족의 따뜻함이 배어 나오는 거실을 둘러본 후, 그 방에 커다랗게 난 창밖을 본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펀이 떠날 길이 보인다.   
  

  모두가 떠난 후 펀은 외롭게 홀로 밤에 시내를 걸어다니고 셀카를 찍기도 하며 쓸쓸한 날들을 보낸다. 그렇지만 데이브나 린다, 스웽키, 밥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친구들은 모두 펀에게 영감을 준다. 어느 날 밤, 펀은 노매드 친구들과 함께 하늘의 별을 본다. 망원경을 통해서 밤하늘을 보면서 지금 우리 눈에 들어온 별빛이 24광년 전에 직녀성에서 떠난 별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지구로부터 무한하게 떨어져 있는 목성도 본다. 이때 한 사람이 별에서 발산된 플라즈마와 원자가 이 땅에 이르고 그것들이 바로 당신의 부분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무한 거리에서 출발한 별빛들이 우리의 시선에 닿고 이 지상에 떨어지고 또 흙으로 나무로 바닷물로, 공중을 나는 새와 지상의 동물들로 순환하는 거대한 우주의 생명력은 결국 정주한 곳이 없이 움직이는 노매드의 삶 자체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근대적 자본주의가 그들을 그들의 안정된 집에서 떠나서 길로 나서게 하지만 캠핑카, 잘 닦인 길, 라이터, 망원경, 핸드폰같은 근대 문명의 발명품들이나 공룡처럼 거대한 자본주의의 상징같은 아마존이나 월 드러그 같은  기업들이 그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생활에 필요한 돈을 얻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완벽히 나쁜 것도 없고 완벽히 좋은 것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순환한다.     

크리스마스 시즌 폭주하는 물건들을 포장하고 보내는 거대한 아마존의 시스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체조하는 펀과 린다


 깨달음도 잠시, 현실은 각박하다. 어느 날 낡은 펀의 밴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정비사는 적지 않은 수리비 대신에 새 차 사기를 권하지만 펀은 자신의 집으로 만들기 위해 들인 정성과 마음이 담긴 차를 포기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수리비를 빌리기 위해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던 언니 돌리의 집에 들른다. 동생을 의지하던 돌리는 반가움에 자신의 집에 함께 살자고 하지만 노매드들을 길로 내몰았던 경제적 상황이 오히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웃들과 함께 있는 자리는 서로에게 불편할 뿐이다. 그런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노매드의 삶을 개척민의 미국적 전통으로 낭만화 시키는 언니의 생각은 ’떠돎‘의 현실적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다. 펀은 돈을 꼭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돌리의 집을 떠난다. 반듯한 사각형의 집 중앙에서 동생과 언니는 각자 반대 방향으로 향하며 헤어진다.     


  노매드들이 모두 차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정도 안된 사람은 영화의 데릭처럼 자기키를 넘는 배낭을 지고 묵묵히  길을 걷는다. 돌리가 싸준 샌드위치를 노상에서 먹다가 펀은 나무 밑에 걸터 앉아 있는 한  젊은이를 본다. 보아하니 언제가 담배와 라이터를 주었던 젊은이다. 애인에게 가끔 편지도 쓴다는 그 젊은이에게 펀은 자신의 결혼식에서 읊었던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들려준다. 아름답던 여름은 사라져도 당시의 아름다움은 내 시속에서 영원히 남으리라는 소네트는 사랑하는 사람은 떠난 것이 아니라 젊은이의 마음에 남아있다는 위로이다. 이 순간 청년은 지난번 펀이 청년에게 준 라이터 대신에 공룡뼈로 만들었다는 다른 라이터를 돌려준다. ”예전에 준 라이터는 벌써 없어졌죠“라는 말과 함께. 데이브와 아들 그리고 손자의 관계처럼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연이든 모든 것은 떠나고 돌아오는 무한 반복의 질서 안에 있다. 단지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펀은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고 세차게 비 오는 날, 홀로 바람불고 파도치는 바닷가에 온다.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자 펀은 다시 아마존에 임시로 고용되어 일을 한다. 시작한 지점에 다시 돌아왔으나 같이 일하던 과거의 친구들은 없다. 펀은 과거 린다와 함께 하였던 퍼즐 맞추기를 혼자 하고 새해를 축하하는 불꽃을 혼자 밝히며 ’해피 뉴이어‘를 혼잣말로 속삭이고 불빛은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어느 날 밤, 모두 둘러앉은 노매드들이 모닥불을 향해 스웽키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하듯 스웽키의 사진을 앞에 두고 돌을 하나씩 불 속으로 던진다. 이것이 스웽키가 바라던 소박한 죽음의 의식이다. 이제 스웽키는 불빛이 되어 무한 우주로 돌아간다. 펀은 스웽키가 이야기하던 절벽의 제비집과 부화한 새끼들이 날고 알 껍질들이 바다에 떨어지는 광경이 담긴 영상을 받게 된다. 펀은 ‘당신은 해냈군요’하며 스웽키에게 존경의 독백을 보낸다.   

   

  돌고 돌아 마침내 펀은 처음 떠나왔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돌아감은 정착이 아니라 이제는 온전히 자유로운 펀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이다. 여전히 창고에는 남편의 옷이 있다. 남편이 일하던 커다란 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US본드’라는 상호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의 집기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지만 먼지가 뿌옇게 쌓였고 보조교사로 일하던 학교는 폐교가 되어 스산하기만 하다. 지난 날 펀은 자신마져 떠나면 남편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질까 봐 네바다를 떠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스웽키의 죽음을 통해서 펀은 죽음은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는 노매드적인 삶의 연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플라즈마와 원자처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흘러가는 물, 오래된 세월의 켜를 안고 있는 나무...그리고 공기로 돌아오는 것이며 펀의 호흡, 펀의 긴 노정을 함께하는 그 순간들에 있는 것이다.  

    

 

‘노매드랜드’가 남기는 여운은 쓸쓸하고 장엄하다. 이별의 의식처럼 과거의 흔적을 모두 둘러본 펀은 과거의 시간만이 켜켜이 앉아 있는 자신의 집에 난 작은 사각의 문을 나와 이제사 자유로운 노매드가 되어 등을 보인 채 천천히 넓고 넓은 사막으로 걸어간다. 마지막 자막에서 영화는 길을 걷는 그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Dedicated to the ones who had to depart. See you dow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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