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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Sep 02. 2021

나, 너 그리고 우리를 엮어내는 영화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리뷰

 

  1970년대 멕시코시티 콜롬비아 로마, 중산층 백인 가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마>(Roma)는 쿠아론 감독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자전적 영화이다. 특히 영화는 입주 가정부인 멕시코 원주민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개인을 넘어 한 가정의 균열과 극복, 격동기 멕시코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 삶의 문제를 투영한다. 특히 클레오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 덧입혀진 현장감 있는 소리들과 흑백 영상 그리고 감독의 미학적 실험이 녹아든 장면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먼 과거의 시간과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로마>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양하다. 우선 자신을 키운 여성들에 대한 쿠아론의 깊은 애정만큼이나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들이 역경을 극복하고 서로 연대를 이루는 페미니즘적 관점이 짙다. 또한 상류층인 백인들의 아래에 깔린 멕시코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탈식민주의, 민주화 물결이 거세던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생태주의적인 비판의 시선이 보인다. 그럼에도 <로마>의 매력은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시키는 미학적 방식에 있다. 이는 색감을 최소화 한 흑백 영상에서 영화 내내 거의 말이 없는 클레오가 조용히 움직이는 동선과 소리, 행위가 관객을 더욱 그녀에게 몰입시키는 생략의 효과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클레오의 캐릭터가 정적이라고 해서  <로마>가 조용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쿠아론은 심중을 쉬이 내색하지 않는 클레오의 주변에 클레오의 상황과는 어긋나 보이는 분주한 사람들과 소란한 소리들, 부산한 상황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그리고 그 안에 동물들이 사방으로 뛰는 움직임등을 흩어 놓고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폭을 넓게 열어놓는다.  

   

바다로 향하는 열린 공간스크린     

  영화가 시작되자 커다란 주차장 타일 바닥을 청소하는 빗자루 소리와 함께 바닥을 씻은 물들이 거품을 내며 점점 더 커다란 물결을 이룬다. 그리고는 서서히 사각형의 바닥 타일이 화면에서 커지며 타일을 덮은 물살에 거울처럼 하늘과 그 안을 나는 작은 비행기의 모습이 투영된다. 사각의 틀 안에 잠시 고인 물이 바깥 하늘의 이미지를 비추듯 쿠아론은 자신이 펼쳐놓게 될 스크린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클레오가 페페와 죽어있는 놀이를 한다. 그순간 카메라는  클레오와 비슷한 옷을 입고 클레오처럼 빨래를 하는 옆집 가정부들을 천천히  보여준다. 

  그런데 물은 고이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하수구로 빨려들 듯이 흘러 사라진다. 관객의 상상력도 함께 빠져나간다. 또 다른 물들이 영화의 흐름에 따라 곳곳에 다른 모양새를 가지고 나타난다. 그러나 더 이상 물들은 하늘을 비추지 않는다. 늪지 깊숙한 곳 웅덩이에 고인 물도 있고 막힌 개수대에서 흘러나가지 못하는 답답한 물도 있고 음식 접시에 떨어지는 레몬 방울이 있고 하늘과 맞닿은 거대한 바닷물도 있다. 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클레오가 주인에게 줄 한잔의 작은 물을 커다란 물통에서 덜어내어 채우는 장면이다. 그냥 의미없이 흘려보낼 수 있는 일상적 장면이지만  이 장면이 <로마>의 주제를 함축한다. 나와 너는 다른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인 '우리'라고. 비록 내가 죽어도 네가 나를 닮은 삶을 이어 간다고.


기억을 깨우는 소리      

  <로마>에서 소리는 서로 다른 문화,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로마>는 영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거나 감동을 배가하는 음악이나 인위적 사운드가 없다. 대신 영화는 우리의 일상에서 늘 들리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수많은 소리들을 날것으로 들려준다. <로마>는 첫 장면부터 집 주차공간 물을 뿌려가며 바닥을 청소하는 빗자루 소리를 들려준다. 아무런 대사없이 물이 흐르는 바닥을 쓰는 소리는 어떤 장대한 배경 음악보다 관객의 상상력과 귀를 영화에 몰입시킨다. 영화의 종반부에서야 관객은 약했다가 점점 강해지는 물뿌림의 소리는 힘있게 밀려오는 바다의 파도 소리를 향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통상 다른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집안 바닥을 걷는 걸음 소리, 설거지 소리, 거리나 시장통에서 보잘것 없는 장난감 하나를 팔기위해 우스꽝스러운 쇼를 보여주는 상인의  감언이설 등...  그런 소리들은 왠지 먼 남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가 살았던 이곳에서 보고 들었던 과거의 소리들을 떠올리게 한다. 지구 반대편, 우리와는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일상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집 할머니와 아기 침대를 사러갔던 클레오가  급작스럽게 양수가 터지자 운전사가 부축하며 병원으로 가고 있다. 그 앞에는 독재에 저항했던 시위대원이 총을 맞고 죽어가고 있다

   소리는 이상하다. 발뒤꿈치를 들어도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간절한 외침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때로 세상은 각자의 고통만으로 힘겹고 도와달라는 타인의 외침에 눈길을 줄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게다가 잡다한 일상의 소리들은 때로 개인의 상황과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 느끼는 개인의 감정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출장을 핑계로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알면서도 떠나 보냈던 클레오의 주인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의 주위로는 시끄러운 차량의 클락숀 소리가 에워싸고, 이혼을 알게 된 4명의 아이들과 저녁을 먹는 야외 식당에서는 가족의 심난함과는 상관없이 방금 결혼을 한 커플을 둘러싼 축하의 소리 들이 시끄럽다. 더욱이 그 테이블의 뒤 머리 쪽에는 식당의 시그니쳐가 게 요리인 듯, 그들을 위협하는 듯한 거대한 게의 형상과 집게 발이 흉물스럽게 뻗어있다. 이때 영화는 말한다. 누군에겐가 최악의 순간은 누구에겐가는 최선의 순간일 수 있다고. 그것이 세상이라고. 그런데 그럼에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당신이 지켜야 할 그리고 당신을 지지할 가족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놀이가 죽음이 되는 곳     

  흑백 필름인 <로마>는 색감이 주는 현란함보다 이미지 자체가 가진 고유의 선과 질감, 움직임 등에 집중하게 한다. <로마>에서는 동물과 자연이 인간과 어울려 자주 등장한다. 클레오의 집에서 키우는 개 한 마리로부터 백인 상류층이 크리스마스때 모인 농장 별장에서는 마치 야생의 무리처럼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이는 개의 무리가 보인다.  어른들 모임에 따라온 아이들은 어른들의 놀이에서 방치되고 아이들은 이때가 어떤 규제도 없는 자유의 시간이 된다. 아이들은 호화롭고 거대한 집안과 집 밖,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무성하게 잡초들이 자라고 물웅덩이가 고인 땅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거친 관목들이 비치는 그 물덩이가에서 총을 든 어른들은 목표물 맞히기 놀이를 하고 있다.    


   자연으로 나아간 아이들은 작은 도마뱀을 잡아 공을 대신 삼아 서로 던지기 놀이를 한다. 누구에겐가는 놀이인 것이 누구에겐가는 죽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이솝 우화의 개구리가 생각난다. 또한 흥청대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 호화로운 거실 벽을 장식하는 것은 그동안 키우다 죽은 개들의 머리통이 전시된 박제들과 사냥으로 잡은 수많은 동물들의 박제물들이다. 그 사이 마른 풀밭 사이에서 불이 나고 양동이 물로 불을 끄려는 소동이 벌어진다. 이런 극박한 상황에 뛰는 것은 하류층 원주민들이다. 어른들의 게으른 무관함과 잔인함이 아이들에게도 전염된다. 그래서 영화는 질문한다. 당신의 무심함이 아이를 당신처럼 자라게 하고 다른 생명들을 예사로이 죽이거나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클레오가  도망친 페르민을 찾아 온 곳. 척박한 모래 광장에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을 마을 사람들은 구경한다.


  전시되어 있는 동물의 박제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것들은 부산히 움직이고 춤추고 총을 쏘는 놀이를 하고 작은 동물을 던지는 놀이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작은 동물은 놀이에서 희생된다. 이는 클레오의 남자 친구였던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같은 하층민도 마찬가지다. 페르민은 뿌연 모래 먼지가 날리는 메마른 모래 광장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클레오 앞에서는 샤워장 커튼 봉을 뽑아 나신으로 현란한 무술을 뽐내며 나름 사나이다운  용맹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클레오가 임신하자 비겁하리만치 재빠르게 도망친 페르민은 극우 정치 깡패 집단에 끼여서는 영웅  심리에 경도된 듯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를 잡겠다고 날뛴다. 슬픈것은 그의 어설픈 광기가 결국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부메랑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주인 집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미리 아기의 침대를 준비하기 위해 들린 가구점에서 클레오는 우연히  페르민을 마주친다. 도망친 시위대를 잡겠다고 정신이 없는 페르민은 예측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클레오에게 총구를 휘두르며 위협하고 놀란 클레오는 아기를 사산하게 한다. 발견된 시위대를 눈앞에서 가차 없이 총으로 사살하는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버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라. 동물이나 태내 아기의 죽음은 페르민처럼 성(性)이 본능적 욕망을 해소하는 놀이에 불과하거나 생명들에 대한 무심함, 물질적 욕망, 이념조차 무장되지 않고 날뛰는 인간의 광기에 의해서이다. 여기에 상류와 하류의 구분은 없다. 총과 나무 막대로 장전된 남성들이 있을 뿐이다.

     

"뭣이 중헌디?"('곡성'에서)     

  쿠아론은 <로마>에서 굳이 성별의 문제를 다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과거의 삶을 이야기 한 것이라고. 그럼에도 <로마>에서 가장 선명한 것은 페미니즘적 분위기이다. 예를 들면 대비되는 남성의 허세와 여성의 현실성이다. 첫 장면부터 집안의 좁은 주차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남편의 캐딜락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단단한 벽과 차의 무용한 싸움이듯이. 사이드 미러가 벽에 부딪혀 접히며 간신히 들어오는 캐딜락의 헤드라이트는 천하무적 괴물처럼 보이면서 분수에 맞지 않는 남편 안토니오의 허세를 보여준다. 남편의 허세에 대한 아내의 응징은 그가 떠난 후 이루어진다. 술에 취한 아내가 캐딜락을 몰고 길거리를 나서고 시내 도로를 지나면서 캐딜락은 양쪽 옆 작은 차들을 박고 지나간다. 결국 차체는 덜렁거리고 테이프를 더덕더덕 붙인 채 집으로 돌아온다. 이혼을 결정한 후 아내는 그 괴물같은 차를 없애버리고 작은 차를 산다. 


  이혼을 결정한 후 남편으로 하여금 집에 들러 자신의 짐을 정리해서 나가도록 하고 그 사이 소피아는 아이들과 바닷가에 놀려온다. 바다에서 돌아와 보니 남편이 가지고 간 것은 빼곡했던 책들이 아니라 책장이었다. 쓸모 없어져 무익한 더미같이 쌓여있는 책들만 남아있다. 이 장면으로 인해 영화는 블랙코미디같은 웃음을 짓게 한다. 그 장면에서 이렇게 쿠아론은 말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빈 사각의 틀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이라고. 삶에서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소리를 듣는 열린 귀라고. 

     

지상의 희망인 나, 너 그리고 우리들.     

  

  남편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흔적을 남기는 사이, 툭스판이라는 바다에 간 여성들과 아이들은 바다만큼이나 거대한 서사를 쓰게 되는 사건을 겪는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클레오가 자신의 목슴을 걸고 점점 파도에 휩쓸려가는 아이들을 구해 냈던 것이다. 바다는 어린 생명을 구함으로써 클레오를 속죄하게 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 이때 놀라서 달려온 소피아와 물에 젖은 클레오 그리고 아이들은 흩어지지 않으려는 듯 서로를 부둥켜 감싸 안으며 한 덩어리를 이룬다. 한팀이 된 그들, 하늘로 향하는 인간 피라미드의 형상이다. 이 순간 아기를 잃은 후 말을 잃었던 클레오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아기가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었다고. 가여운 아가를...'.  우는 클레오에게 소피아는 "우린 널 정말 사랑한단다"라는 말로 그녀의 아픔을 끌어안는다.

      

  <로마>에서 시작을 열었던 물은 상상력을 위한 공간을 열기도 했지만 공포로 인해 흘러내렸던 클레오의 양수처럼 채 태어나기도 않은 아기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클레오는 또다시 아이들을 잃을 수 없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생명을 집어삼키는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무의식에 가까운 클레오의 용기이며  엄마같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바다는 젊은 여자와의 새로운 삶을 위해 가족을 버린 남편, 임신한 클레오로부터 도망치고 끝내는 태내의 아이까지 죽게 한 페르민의 날뛰는 광기와 폭력이 남긴 고난으로부터 여성과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서로 연대하게 하는 힘을 회복하게 한다. 그래서 그녀들이 겪었던 고통이나 흘렸던 눈물은 오히려 역설적인 일어섬과 성장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불행은 행을  단단히 다지는 필요악이 되기도 한다.  


   한 인터뷰에서 쿠아론은 말한다. <로마>는 천국과 지상에 대한 이야기이며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외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집에 돌아온 후 클레오는  아이들처럼 같이 일하는 가정부 아델라에게 할 이야기가 많아질만큼 전에 없던 활기를 띤다. 영화의 마지막, 여행으로 인해 쌓인 빨랫감을 빨기 위해 높은 계단을 따라 클레오가 옥상으로 오른다. 클레오가 사라진 화면에는 프레임을 꽉 채운 하늘을 오를 듯 위로 향하는 계단이 남고 하늘에 작은 비행기가 날아간다. 클레오와 소피아의 가족이 바다에서 얻은 것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며 그것이 지상에 남은 자들이 삶을 견뎌낼 희망일 것이다. 그러기에 천국 오르기는 우리가 사는 지상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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